2025-08-06 15:08•조회 88•댓글 8•유하을
비가 내렸다.
도시의 빛이 젖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런 저녁이었다.
지안은 우산을 들지 않았다.
머리가 젖는 것도, 코끝이 차가워지는 것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무기력했다.
숨이 막히는 듯한 감정. 무언가가 목 끝까지 차올라 터질 듯한데,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걸어가면 어디로 가게 될까.
그저,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때였다.
좁은 골목 사이, 흐릿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지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가게를 바라봤다.
불이 켜진 작은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억을 파는 상점
잊고 싶은 기억, 떠올리고 싶은 순간을 거래합니다 -
누군가 장난삼아 붙여놓은 컨셉 가게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지안의 가슴 한켠이 찌르듯 아려왔다.
잊고 싶은 기억.
정확히 그 단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에는 예상보다 훨씬 조용하고, 어두웠다.
공기에는 오래된 종이와 차의 향이 뒤섞여 있었다.
벽에는 낡은 시계가 걸려 있었고, 선반엔 각기 다른 병들이 놓여 있었다.
그 병들 안엔 액체도, 약도 아닌 빛나는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처음 오셨군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깜짝 놀란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운터 안에는 흰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안개처럼 깊고, 차분하게 빛났다.
“기억을… 판다고요?”
지안의 목소리는 작았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당신의 기억을 살 수 있습니다. 혹은… 남의 기억을 구매하실 수도 있지요.”
“그게 정말 가능한 거예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남자는 지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억을 판다는 건, 단순히 지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기억은 누군가에게 옮겨집니다.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그 순간의 감정이나 기억을 떠올릴 수 없게 되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지안은 숨을 삼켰다.
정말, 가능한 걸까.
그렇다면… 정말 그 기억을 없앨 수 있다면…
그날을, 그 사람을, 그 말 한 마디를…
“만약 제가 기억을 팔면, 그건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남자는 조용히 선반 뒤의 문을 가리켰다.
“우리의 ‘기억 수집자’가 받아들입니다. 직접요.”
“기억 수집자?”
“그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어떤 기억을 팔고 싶으신가요?”
지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년 겨울…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의 기억이에요.”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가볍게 진동했다.
남자는 책상 아래에서 오래된 노트 하나를 꺼내 펼쳤다.
“이름, 나이, 그리고… 그 기억에 담긴 감정을 말씀해주세요.
그게 거래의 기준입니다.”
지안은 입을 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슬픔.
그날의 기억은, 모든 게 무너졌던 슬픔이었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들었다.
기억은, 슬플수록 싸다.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행복했던 날을 지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의 슬픔이, 지안에겐 너무 컸다.
한 생의 무게만큼.
남자는 차를 한 잔 건네며 말했다.
“이건 계약 전 마지막 물음입니다.
그 기억을 잃은 후, 당신은 진짜로 괜찮을 수 있겠습니까?”
지안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싶어요.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