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는 오후 두 시를 삼켜버렸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긴 듯, 모든 것이 느려졌고, 나는 그 느림 속에서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지하철 출입구 앞, 빽빽이 서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은 이미 30분 전이었지만, 도착했다는 연락도, 늦는다는 메시지도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수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얼굴들 속에서 자꾸 그를 찾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빗방울이 우산 끝을 때리는 소리는 의외로 위로가 됐다.
고요하되 고요하지 않고, 무너지되 흐트러지지 않는.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그러했다.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 말은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단지 고백에 약간의 미안함과 체념을 섞었을 뿐.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이후로, 나는 어떤 감정도 쉽게 들이붓지 못했다.
좋아한다고 말해도 마음은 반쯤 비어 있었고, 웃어도 입꼬리만 움직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나에겐 두려움이 되었다.
그게 시작이 아니라, 끝의 징조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빗속에서 나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뒤돌았다.
그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고 말았고, 기다리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간다.
미련이란 단어는, 사실 희망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지독하다.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은 마치 낡은 영화의 엔딩처럼 보였다.
내려갈수록 빛은 줄어들고, 습기가 짙어지고, 발소리는 커졌다.
플랫폼 끝자락에서 나는 가만히 선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람은 왜 계속 약속을 할까.
지켜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눈을 떴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은 조용히 타고, 조용히 내렸다.
우산 없는 사람들은 천천히 뛰었고, 우산 있는 사람들은 더 천천히 걸었다.
그를 잊는 데 얼마나 걸릴까.
어쩌면,
우산 없이 걸어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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