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눅눅하게 스며드는 거리
그날 이후로 내 세상은 온통 이상현을 향해 눅눅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창밖을 때리는 빗소리만 들리면 어깨가 맞닿았던 그 좁은 우산 속이 생각났고, 코끝에는 그 애에게서 나던 서늘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짝사랑이란 참 미련한 것이어서, 한 번 물길이 트이자 내 모든 감정이 통제력을 잃고 이상현이라는 바다를 향해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다음 날 아침, 교실 문을 열자마자 내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 창가 맨 뒷자리로 향했다. 이상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턱을 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제 내 쪽으로 우산을 죄다 기울여주는 바람에 왼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가던 이상현의 뒷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시려왔다. 가방 속에는 아침 일찍 매점에 들러 사 온 차가운 초코우유 하나가 들어 있었다. 고작 우유 하나 건네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가방끈을 쥔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났다.
“……이상현.”
종이 치기 직전,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이상현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내 목소리에 이상현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맑고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 한시은. 안녕.”
“어, 안녕……! 그, 이거 어제 우산 씌워준 거 고마워서. 매점 갔다가 생각나서 샀어.”
나는 서둘러 초코우유를 이상현의 책상 위에 툭 올려놓았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살짝 뒤집힌 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상현은 책상 위의 우유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으며 웃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아냐, 내가 더 고맙지! 그럼 나, 나 갈게!”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 이마를 쾅 박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이상현은 내가 준 우유의 빨대를 꽂아 조용히 마시고 있었다. 그 사소한 모습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지는 내가 참 우스웠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5교시 청소 시간이었다. 하필 이상현과 내가 같은 특별실 청소 구역으로 배정되었다. 아이들이 대충 빗자루질을 하며 장난을 치는 어수선한 와중에, 나는 멀찍이서 창틀을 닦고 있는 이상현을 훔쳐보았다.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고민하던 그때, 반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남자아이들이 이상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다가왔다.
“야, 이상현. 너 이번 장마 끝나면 바로 전학 간다며? 진짜냐?”
멀리서 들려온 그 한마디에,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걸레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내리는 기분이었다. 귀를 의심하며 이상현이 서 있는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 그렇게 됐어.”
이상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쉽네. 기껏 친해지나 했더니. 어디로 가는데?”
“좀 먼 곳으로 가. 아주 멀리.”
이상현의 시선이 아주 잠깐, 복도 창밖으로 내리는 장대비를 향했다.
장마가 끝나면 전학을 간다고? 내 귀로 직접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말 한마디 섞었고, 이제 겨우 그 애의 미소를 마주 보게 되었는데. 내 마음은 이제 막 거센 장마처럼 시작되려 하는데, 이 짝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여름 장마 기간만큼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처럼 아려왔다. 이상현이 먼 곳으로 떠나버리면, 나는 이 그치지 않는 마음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나는 화장실로 도망쳐 세수를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빗물에 젖은 생쥐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방과 후, 하늘은 내 속도 모르고 더욱 잔인하게 비를 퍼부었다.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빈 교실에 홀로 남아 창밖을 보는데, 문득 이상현의 자리에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우산을 챙기러 간 건지, 주인을 잃은 가방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이상현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 애의 온기가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책상 위에, 아침에 내가 준 초코우유 곽이 깨끗하게 비워진 채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상현이 쓰던 공책 한 권이 살짝 열려 있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공책을 들여다본 순간, 나는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공책에는 이상현의 반듯한 글씨체로 무언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날짜별로 내린 비의 양을 기록한 일기 같기도 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메모 같기도 했다.
[7월 12일. 누적 강수량 45mm. 손목의 감각이 조금씩 흐려진다.]
[7월 18일. 누적 강수량 70mm. 비가 내릴 때마다 내가 세상에서 조금씩 흐려지는 기분이 든다.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는 꿈을 꿨다.]
그리고 가장 최근 날짜인 오늘 자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7월 25일. 누적 강수량 85mm. 장마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내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 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거기서 뭐 해, 한시은?”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공책을 덮었다. 언제 돌아온 건지, 이상현이 문가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평소와 너무 달라서, 나는 나쁜 짓을 들킨 아이처럼 온몸을 떨었다.
이상현은 천천히 걸어와 내 손에 들린 공책을 거두어갔다. 그리고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 봤어?”
그 애의 눈동자 너머로, 창밖에 내리는 장대비가 마치 소년의 눈물처럼 위태롭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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