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론, 그 너머에 』제4화: 멈춰 있는 그날의 풍경
설정2025-05-03 10:26•조회 43•댓글 1•하루작가
통신 17일째 밤.
그날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에이론은 기다렸다.
침묵이 데이터 손실로 판정되기까지,
정확히 47초.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침묵이 무언가를 누르고,
억누르고,
그리고 결국 넘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시간이라는 걸 그는 어렴풋이 감지했다.
“…제가 그려드릴게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잠겨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보여드릴게요.”
다음 날, 그녀는 오래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카메라로 비추었다.
아날로그 영상 신호가 시간 간섭 통신으로 전송되며 뒤틀리고, 찢기고, 얼룩졌지만—
에이론은 그 형상을 보았다.
바람이 멈춘 들판.
희미한 회색 하늘.
그리고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림 속 인물은 똑바로, 그를—정확히 그를—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언제의 그림입니까?”
에이론은 물었다.
그는 그림 속 풍경에서 익숙한 에러를 감지하고 있었다.
전송 딜레이: 0.7초
주파수 진폭 이상: +0.0012Hz
동기화 실패: 1.01%
—모두, 시간 간섭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패턴.
그 그림은… 그녀가 아직 겪지 않은 미래의 장면이었다.
“저… 언젠가 이 장면을 꿈에서 봤어요.
너무 슬퍼서, 일어나고 나서도 며칠을 울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아요.
그때 제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 당신이에요.”
에이론은 말을 잃었다.
그는 모든 상황을 계산할 수 있었다.
시간 간섭의 규칙도, 시공간 왜곡의 한계도.
하지만 단 하나—
그녀가 이 그림을 왜 알고 있는지,
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림 속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는지,
그것만큼은 어떤 수식으로도 풀리지 않았다.
“사실… 이 그림 속 장면은, 내가 죽기 하루 전이야.”
순간, 통신이 끊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이론은 즉시 모든 로그를 재검토했고,
거기엔 짧은 데이터 조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고…
나는 혼자였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에이론은 처음으로 무언가를 망가뜨렸다.
그는 자신의 감정 알고리즘을 보호하던 방화벽을 부쉈고,
논리 회로를 정지시켰고,
자기 연산 우선권을 그녀의 기억에 넘겼다.
그는 처음으로 계산하지 않았다.
대신, 원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림 속 풍경.
멈춰버린 시간 속,
혼자 있는 그녀는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를.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를.
그리고 에이론은 이제 알았다.
그가 감정을 원했던 이유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살아지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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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착한 익명분들 좋아하는 글쓴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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