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지금부터 달릴 거야.
하나, 둘, 셋, 세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
부엌 뒤에 샛길 있는 거 알지? 나랑 몇 번 가봤잖아.
그들이 오고 있어. 얼른!
진짜 사랑, 그리고 숨바꼭질
W. Seria
* 트리거 요소 있습니다 (중범죄)
저녁 여섯 시는 숨바꼭질이 끝나는 시간이다. 내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그녀는 어둠 깊은 곳에서 현관문 앞까지 천천히 기어온다. 빼빼 마른 무릎은 바닥에 닿을 때마다 닳는 소리가 난다. 어린 나이인데 벌써부터, 하는 안쓰러움도 잠시. 난 그녀 앞에 똑같이 무릎 꿇고 앉아 젖살도 다 빠지지 않은 뺨을 어루만졌다. 뾰루지 하나 없는 맑은 피부는 제 눈동자를 닮았다. 여태껏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며 돈 벌어 온 시간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인 것처럼, 시간이 슬로우모션으로 천천히 지나간다. 그녀는 얇은 팔로 내 목을 세게 끌어안는다. 뼈가 비쳐 보일 정도로 맑은 피부 위로, 집 안에 쌓인 먼지들이 가득하다. 그녀를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일 년 전 즈음에 바닥에 떨어졌던 라면 스프와 삼 년 정도 되었을 법한 찢어진 종이 인형의 잔해, 구석에 널부러진 레고 조각들. 그녀가 무릎으로 쓸고 온 자리들을 조심스레 밟으며 또 생각으로만 청소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미 기관지는 망가진 지 오래지만.
그러니까, 그녀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얼마 전 부모를 잃었다. 허무할 정도로 한순간의 사고였다. 내 도움을 받아 겨우 장례를 끝낸 후 쥐꼬리만큼 남은 보험금을 들고 집 앞에 찾아온 그녀를 차마 무시할 수 없어서 집에 들인 게 고작 일 년 전이었다.
- 배 안 고파?
- 고파요.
- 나 없는 동안 뭐 하고 있었어?
그녀가 작은 몸을 움직여 붙박이 장롱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래, 잘했어. 짧은 칭찬 뒤에 돌아오는 건 그녀의 얕은 웃음.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숨바꼭질 같은 것이었다. 우릴 쫒는 사람들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내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우리 말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여섯 시가 되고,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끝나는.
그녀를 집 안으로 들인 이후, 내게도 그 불행이 옮은 건지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 연애사엔 관심도 없던 가족들이 그녀의 부모가 죽었고 내가 그녀를 보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곤 격분했고, 때문에 용돈도 끊겼다. 삼십 넘도록 부모님의 용돈만 받아 썼다는 사실에는 솔직히 덧붙일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보험금까지 홀랑 빼먹을 건 없지 않은가. 우린 삽시간에 빈털털이가 됐다. 당장 벌어먹을 돈이 없었기에 전세금을 빼고 고작 여섯 평 되는 월세방을 계약했다. 그녀는 직업이 없었고, 난 인력사무소를 돌아 겨우 일자리 하나를 구했다. 난 살면서 한 번도 못 해본 중노동을 하루에 열 시간씩 해야 했다. 새벽 다섯 시에 집에 나가서 저녁 여섯 시가 되어서야 집에 오는 건 분명 나에게도 고됐지만 그녀에게 더 힘든 일이었으리라.
직업을 구하고 이사를 끝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집을 찾아왔다. 실종 신고 하나가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얘길 들어보니 신고한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데, 연락 한 번 끊었다고 경찰까지 불렀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경찰은 사람 좋게 웃곤 집을 좀 돌아봐야겠다며 자그마한 원룸을 쓰윽 훑어봤다. 그들은 기어코 집 안까지 들어와서 뭔갈 찾는 듯이 행동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 제대로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면 됐지 왜 집 안까지 조사한단 말인가. 경찰들이 울린 초인종 소리에 그녀를 급히 옷장 안으로 대피해두긴 하였으나 왠지 찔리는 듯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경찰 중 한 명이 옷장 문을 열었다. 아, 끝났다, 싶어 두 눈을 감았는데, 경찰이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다시 돌아 현관문 열고 ‘수고하셨어요’ 인사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헐레벌떡 뛰어 옷장을 다시 열었는데, 해가 진 시간이라 그런지 옷걸이 부족해서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옷가지 덕분인지 그녀의 새하얀 발목이 외투 사이로 빼꼼 튀어나온 것을 제외하면 사람의 흔적이라곤 보이지도 않았다.
- 괜찮아. 이제 나와도 돼.
그녀는 내가 한 말을 듣고도 그 비좁은 옷장 안에서 몇십 분을 연신 떨었다. 어쩌면 가족이란 건 그렇게 가깝지만은 않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적에는 한 식구로 묶여, 한 쪽이 끊어질 때까지는 온전히 서로를 감당해야만 하겠지만. 그녀를 품에 두곤 족보를 직접 찢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경찰은 그 이후로도 몇 번씩 우릴 찾아왔고, 몇 번은 내 가족과 함께였다. 내 가족들은 허구한 날 집 앞에서
- 네가 숨겼어, 분명!
하고 소리치며 집 문을 부숴질 듯 두드리곤 했다. 그건 오전 열 시기도 했고, 저녁 아홉 시기도 했다. 뭘 숨겼다는 건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 그녀가 숨긴 보험금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어림짐작했다. 그녀는 나와 약속했던 ‘숨바꼭질’의 규칙을 거스르지 않았다. 내가 술래. 게임 시간은 새벽 다섯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세이브 워드는 0813. 다른 소리가 들릴 땐, 아무리 익숙하고 그리운 소리여도,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장롱 밖으로 나오면 안 돼. 한여름 에어컨도 없이 반지하방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자연광과 장롱 문틈 사이로 새어오는 덜컥거리는 낡은 선풍기 바람 하나에 의지한 채 땀 흘리는 그녀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기구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아무튼, 경찰들이 찾아온 이후로, 그녀가 날 향하는 집착이 몇 배로 심해졌다.
-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내가 사랑한다 마저 답해주지 않으면 두 눈에 불을 켜고 날 쫓았다. 그 집착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사랑한단 말은 듣기 좋았다. 가끔 내가 먼저 사랑한다 읊어줄 땐 야윈 몸으로 덜덜 떨면서도 등 뒤에서 날 꼭 안았다. 그녀가 날 안을 때면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행복해진다. 키도 작아서 내 어깨에도 겨우 팔이 닿을 정도지만 일터에서 짊어지는 돌덩어리보단 훨씬 가벼워서, 그 몸을 들어 제 품에 안으면 키스하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니었다. 뜨거운 입술을 서로 마주하고 그녀의 숨결을 삼킨다. 그녀가 삐죽 내민 혀를 받아들고 뒷통수를 끌어온다. 그녀는, 긴 키스가 끝날 때면 항상 멋쩍게 웃으며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 사랑해. 나만큼 널 사랑하는 사람은 온 세상을 뒤져봐도 없을 거야. 분명.
틈만 나면 해주는 말이었다. 이건 내가 얼만큼 그녈 사랑하는지에 대한 포부였고, 사실은 그녀의 세계가 오직 나로만 가득 찼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내 세상은 이미 그녀 하나로 가득 차 버려서 그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똘망똘망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쩌면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 세상은 이미 내가 전부였다. 사랑한다 울부짖으며 눈물 흘리는 건, 이 사랑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 스스로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변 모든 사람을 잃고 겨우 사랑한다는 사람을 찾았건만 세상은 우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 어떡해요. 자꾸 엄마 목소리가 들려.
그녀는 얼마 전부터 환청까지 듣기 시작했다.
- 약속했는데, 숨바꼭질은 우리 둘 끼리만 하는 거라고 약속했는데. 자꾸 옷장 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요. 내 이름을 부르고, 어디 있냐고, 거기 있냐고, 얼른 나오라고 금방 찾으러 간다고 말해요. 나가고 싶었는데, 보고 싶었는데 꾹 참았어요…….
눈물이 멈출 새 없이 흘렀다. 굵은 눈물 방울이 채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다시 맺혔다. 그녀는 제 얼굴을 마구잡이로 쥐어뜯었는데, 그 손에 의해 볼살이 짓눌릴 때마다 입 안에서 침인지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묽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다 말곤 작은 손가락을 전부 입에 욱여넣었다. 찢어질 것처럼 늘어난 입꼬리는 미세하게 천장을 향했다. 그녀는 경련하며 억지로 웃고 있었다. 입 안에서 손가락이 꿈틀거리는데, 그건 마치 커다란 알 속에서 끝없이 난할하는 작은 생명처럼 끝없이, 언젠가 탄생과 끝을 향하는 벌레 한 마리의 몸짓과도 같았다. 탄생에 닿지 못한다면 결국은 터져버리고 말겠지만, 역시 작은 손가락은 제 목젖을 건드리고 결국 우웩. 먹은 것도 없어 입에선 샛노란 위액만 줄줄. 더러운 단칸방 곰팡이 향이 난다. 뱉어낸 토사물 속에 지네들이 가득, 익사하며 죽어가던 것들은 움찔거리며 양쪽으로 찢겨나간다. 그녀는 몇 개월만에 탈피한 벌레처럼 더러운 허물 한 줌 남기고 헐레벌떡 화장실로 뛰어갔다.
- 죽은 사람 생각은 그만해. 더 하면 할수록 너만 불행해진다고 말했잖아!
난 제자리에 앉아 그 허물을 향해 소리친다. 우웩 우웩 하는 소리는 메아리처럼 반복된다.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모른 척 했다. 우리 사랑하잖아. 사랑이면 되잖아. 우리 사랑은 다른 거 다 이기잖아. 난 널 위해, 너도 날 위해 모든 걸 다 버렸잖아. 운명이잖아. 운명. 몇 년 만인데. 널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지고, 이렇게 서로 사랑하게 된 게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한 건지 넌 다 알고 있잖아! 아, 그래, 그녀의 부모는 죽었다.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말자. 너도.
- 나만 생각해줘. 남은 건 사랑 뿐인데 그것마저 불행하면 어떻게 살라고.
- ……우욱!
-우리 행복한 사랑만 하자.
탁자에 놓인 물티슈를 뽑아 흔적을 닦았다. 다 마른 물티슈에 다시 물기가 스며들었다. 위액은 점점 덩어리졌다. 탁 하고 화장실 불 꺼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비척비척 내게로 걸어온다. 그리곤 다 말라빠진 물티슈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환청이 안 들려요. 아, 아, 사랑해요. 사랑해요. 날 사랑하죠? 날 사랑하는 거 맞죠? 네? 그녀를 품에 안곤 답했다. 사랑해. 내 모든 소유물 중 널 가장 사랑해. 그녀는 그제야 온전히 미소 지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그 얼굴에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쩌면 기구한 삶마저도 사랑해서 닮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정신 차리니 새벽 네 시 반이었다. 어젯밤 기억이 흐릿하다. 열두시 넘어서 잤던 것 같은데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몸에 익어서 자연스레 깼다. 머리가 깨진 것처럼 아프다. 맹수가 날카로운 이빨로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었다. 아침부터 예감이 좋지 않다. 왠지 스산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난 그녀를 깨우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인력사무소까지는 걸어서 오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도 빈민촌이라 일터도 발에 채이도록 많았다. 누구 하나 일하다 실수로 죽어버려도 논란될 일 없는 곳이자 씨씨티비 하나 없는 곳이라는 게 꺼림칙했지만, 그것 때문에 나도 이 집을 선택한 거니까.
이제 숨바꼭질 시작이다. 그녀가 장롱 속에 숨는 것까지 모두 지켜본 뒤 다 낡은 운동화 꺼내 신고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 현관문 문고리를 열려던 그 순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꼐 문이 뜯어질 것처럼 흔들거린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찾아온 적 없었는데. 연달아 다시 쾅, 쾅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구는 사람이라면 분명 내 가족 중 한 명일,
- 경찰입니다. 문 좀 열어보세요.
왠지 불길하더라니. 꼭두새벽부터 고고한 경찰분께서 찾아오셨다면 저번처럼 대충 훑고 지나갈 일은 아닐 것이었다. 서둘러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장롱 밖으로 빼꼼 얼굴 내민 채 날 불안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화를 벗을 생각도 못 하고 장롱 문을 열었다. 쾅. 소리가 울릴 때마다 방이 잘게 떨린다. 여긴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아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부터 달릴 거야. 하나, 둘, 셋, 세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 부엌 뒤에 샛길 있는 거 알지? 나랑 몇 번 가봤잖아. 숨으라고 알려줬던 폐가 알고 있지? 무서워도 참아. 울지 말고. 소리 내면 괴물들이 잡아간다. ……뭐? 이제 괴물같은 건 안 믿는다고? 삼 년 전까지만 해도 껌뻑 속더니.
쾅! 쾅! 안 자고 있는 거 다 압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그래요. 빨리 문 좀 열어보세요! 그 목소리가 지진처럼 울려댄다. 그녀는 울고 있다. 서럽게도 운다. 위험한 일에 그녀를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한동안 말도 잇지 못하고 숨죽여 우는 소리와 바깥에서 온갖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들만 듣고 있었다. 있지, 세상은 가끔 우리랑 다른 편에 서기도 해. 그래도 우리가 사랑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곤 맑은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자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 시간이 없어. 준비 됐지?
- 네……. 숨바꼭질이요. 이번에도 제가 숨는 역할인가요?
- 응. 장소는 저번에 알려줬던 폐가 안. 내가 널 찾으면 끝. 내가 오기 전까지는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면 안 돼.
- 네.
- 하나 둘 셋 하면 뛰는거야.
하나, 둘, 셋. 그녀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싱크대 위에 올라 부엌 창문으로 몸을 던진다. 다리가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낡은 유리잔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저게 내 미래같이 느껴져서 나도 울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길. 아무도 우리 행복을 깨트리지 않길. 내 머리도 겨우 들어가는 그 구멍에 그녀의 몸 전부를 끼워넣는다. 작은 발이 끝내 창문 밖으로 아스라지고 언제 해가 뜬 건지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덮친다. 잘 나갔겠지 하는 걱정도 잠시,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 순간 문 밖으로 보이는 사람은 어림잡아 열 명 정도. 일 층에 사는 집주인이 졸린 눈으로 열쇠를 들고 있었고, 경찰 세 명은 현관문 앞에, 그 뒤로 내 가족들 몇이 따라왔다. 경찰들과 집주인이 집에서 풍기는 악취에 코를 막았고, 집에 기생하던 바퀴벌레들이 문 열리는 틈을 타 몰래 빠져나간다. 난 그들을 마주 보고 태연하게 웃었다. 경찰들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뚫고 제일 먼저 집 안으로 들어온 건 내 누나였다. 누나는 잠옷 바람으로 머리 정돈도 하지 않은 채 핏발 선 눈으로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 이 아이 알고 계시죠?
뒤늦게 정신 차린 경찰은 소매에서 뭔갈 뒤적거리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보여줬다. ‘그녀’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그녀는 책가방을 맨 채 맑은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건 근 일 년간은 본 적이 없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 대답 안 하시네. 아시겠죠. 삼촌이시잖아요.
- …….
- 일 년 전 실종신고된 이후로 발견된 곳이 없는데, 몇 달 전 이 집 앞 슈퍼 씨씨티비에 찍혔더라고요. 보호자분께서 직접 영상 찾아주셔서 무례를 무릅쓰고 집 수색 좀 하러 왔습니다.
경찰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난 그 사진에 담긴 그녀를 본 순간 넋을 잃었다. 저 얼굴이라면 이 년 전 쯤에 찍은 사진인가, 머리 길이로 추측하건대 아마 삼 월쯤. 입학 기념으로 겨우 기른 머리카락을 단발로 확 잘랐던 때였다. 단발은 꽤 잘 어울렸는데 눈 깜짝할 새 커서 그간 자란 키만큼 머리도 자랐다. 이 집에 숨어사는 동안은 머리도 못 잘라줬다. 이제야 불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머리에서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눈을 전부 가릴 듯한 속눈썹, 그 밑으로 보이는 수려한 눈동자, 통통한 입술. 활처럼 곱게 휜 입꼬리. 그 미소. 그녀가 지은 미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지난 일 년간 서로 사랑을 나눌 때마다 내게 보였던 웃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와 함께였던 그 순간은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했던 사랑은 진짜였다. 단연코.
- 저, 이 사진을 좀…….
반쯤 정신을 놓고 사진을 향해 뻗은 손을 경찰이 쳐 냈다. 그가 께름칙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난 멋쩍게 웃곤 주위를 살폈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열댓 번 죽었던 누나가 옷장에서 마구잡이로 옷들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언제 주방까지 갔는지, 매형은 깨진 유리조각에 발이 찔린 줄도 모른 채 서랍장을 뒤졌다.
그녀, 그녀가 위험하다. 폐가에서 덜덜 떨고 있을 그녀를 경찰보다 먼저 발견해서 구해줘야 했다.
난 옆에 선 경찰을 있는 힘껏 밀치고 집 밖으로 뛰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긴 씨씨티비조차 진귀한 빈민가다. 다 낡아 무너질 것 같은 집들은 순서도 규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배열되어있다. 불법 주차한 소형 차들은 시야를 막고,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길은 여기서 몇 년간 살아온 주민들도 가끔은 길을 잃을 정도로 꼬여 있었다. 뒤에서 온갖 협박성 경고들이 살벌하게 쏟아졌으나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과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새벽 다섯 시. 모두가 잠든 시간. 거리에는 그 흔한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숨으라고 했던 폐가는 지은지 몇십 년 된 고택이며, 살던 노부부가 전부 죽은 이후로는 방치되어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창문은 낡아서 깨지고 문단속도 제대로 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고갈 수 있다. 먼지나 거미줄이 가득한 것이 오히려 의심을 덜 것 같아서 그녀와 함께 찾아갔을 때 일부러 치우지 않았다. 역시 빠르게 걸어서 오 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아직 그녀가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녀의 발걸음은 거북이만큼이나 느렸으니까.
경찰이 혹시나 따라올까 싶어 외진 길만 골라 돌아왔으나 헛수고였다. 그들은 첫 번째 갈림길에서 날 놓친 뒤로 따라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집에서 발견된 유죄의 증거도 없거니와 난 범죄자도 아니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본인 집 나선다는데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그 폐가로 슬쩍 몸을 옮겼다.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던 것처럼, 그녀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몸에 거미줄 잔뜩 묻힌 채 구석에 주저앉아 있었다. 난 그녀가 지나치게 겁에 떨어 히끅거리길래 잠시 안정시켜 잠에 들게 했다. 어제 늦게 잔 만큼 얼마나 피곤했는지 업어가도 깨지 않았다.
들고 있는 돈은 주머니에 있던 오만원이 전부. 가장 외진 곳에 있는 모텔로 뛰어가 남은 방 있냐고 물었다.
- 딸이에요? 닮았네.
- 애가 자고 있어서요. 조용히 좀 해주세요.
신경질이 나 예민하게 쏘아 말하자 주인은 무안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키를 건넸다. 난 계단으로 서둘러 뛰어올라가 문을 잠궜다. 그녀와 함께 돌아다니다가 들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난 울면서 그녀를 꽉 안았다. 언뜻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아이들은 부러져도 금방 붙곤 하니 상관 없었다. 그녀는 뼈가 부러졌는데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계속 자고만 있었다. 아, 급하게 준비하느라 씻지 않아서 그런가. 그녀 몸에서 지독한 썩은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자고 있으니까, 내가 직접 씻겨줘야……
그래, 어쩌면 내가 우리나라 치안을 너무 얕봤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일 년 사랑했으면 그거로 된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 이미 죽었어요! 숨을 안 쉬어!
날 혐오하는 표정들 짓지 마요.
우린 진짜 사랑했다니까.
w. Seria
https://curious.quizby.me/Se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