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재주의
그 해 여름, 나는 하지우에 스며들었다. 따뜻한 여름은 빠르게 지나갔고 가을이, 또 겨울이 왔다. 우리는 바닥에 고인 빗물에, 떨어진 낙엽에, 흩날리는 눈에 질퍽이며 언제나 맑을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 헐렁하던 우리의 교복이 줄어서 다시 맞춰야 했던 우리의 다음 여름이 네 열병의 시작이었다.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사실 별 생각 없었던 것 같다. 개도 안걸린다는 여름 감기를 걸렸냐며 디엠을 했고 밤에는 침대에 누워 전화를 했다. 너는 여름에 감기 안걸리겠다는 농담을 들으며 웃었다. 내가 어디가 개를 닮았다는 거야. 살면서 고양이는 들어봤어도 개 닮았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 전화를 하면서 너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그게 거짓말인줄 알았더라면 나는 너를 잃지 않았을까.
장마가 여름을 지나치는 내내 앓던 너는 장마가 끝나자 거짓말처럼 나았다. 너는 네가 아팠던 것에 의문을 가졌고 나는 운동 좀 하라며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하러 뛰어다니는 무리에 하지우를 던져 넣었다. -이 친구들과의 인연은 고딩까지 이어진다.- 그 여름에는 이은채의 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엄마와 사모님이 만나는 빈도가 줄었고 하지우의 몸에 물든 피멍이 늘 때 알아봤어야 했다. 하지우가 아버지의 전화를 받으며 몸을 떨 때 이은채는 알았어야 했다. 그렇게 수많은 흔적이, 상처가 있었는데 나는 그 해 겨울이 되어서야 알았다.
히지우에게 빌린 옷을 돌려주려 거대한 아파트 앞에 섰다. 그 높이에 압도 되어 가장 높은 옥상을 올려다 보았다. 그 위에 분명히 사람이 있었다. 선명하진 않지만 확실하게 알았다. 날리는 검은 머리에 흰 옷. 하지우였다. 안 춥나?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하지우가 난간을 벋어나 뒤로 뛰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왠지 지금 만나면 안 될 것 같아서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얇은 옷을 입은 하지우가 있었다.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머리를 넘기며 다시 아파트로 향하는 하지우. 그 뒤로 계속 옥상을 하염없이 바라봤지만 너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진 하지우, 너도 아는 이야기.
질퍽질퍽순애
지금부터 말하는 그 날은 네가 모르는 이야기야. 그날 밤 하지우의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자기가 집이 아니라 어머니랑 있는데, 하지우가 아픈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돌아올 때 감기약이나 해열제를 좀 사오라는 카톡을 받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모님이 집에 안 계세요? 부터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의문도. 옷을 입고 현관문을 여는 내내 언니에게 설명을 들었다. 울먹이며 횡설수설하는 언니가 낯설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하지우에게 달렸다. 너에게.
회장님께 맞아 매일 몸이 피멍으로 물들었던 하지우. 자신이 몰랐던 사이에 진행된 이혼 결정. 이제 혼자 회장님을 감당해야 할 하지우. 오늘 옥상에 올랐던 하지우. 네 집의 도어락을 열었다. 익숙한 구조를 지나쳐 네 방까지 달렸다. 숨을 몰아쉬며 연 방문 뒤에는 후끈한 열기가 있었다. 열기가 활활 피었다.
네 방 중앙에 있는 침대에 네가 이불로 몸을 싸매고 잔뜩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18살이 되어 네가 떠났던 그 병실에서 그랬듯, 나는 언제나 문을 열고 너에게 달렸다. 대충 얼굴만 봐도 열이 39°는 넘는 것 같은데 병원을 데려가려 해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열이 가득 찬 이불을 걷었더니 얼어버린 네 다리가 드러났다. 이 날씨에 반바지를 입으니까 감기에 걸리지. 물을 찾으려 냉장고를 뒤지며 중얼거렸다. 직감적으로 찬 물을 먹이면 진짜 살인일 것 같아서 냄비를 꺼내 물을 끓였다. 뭔 재벌이 정수기가 없어.
잘 앉지도 못해서 힘겨워하는 하지우를 끌어 당긴다고 고생 좀 했다. 약을 먹고도 하지우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은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축축한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가 너무 뜨거워서 움찔거렸다. 약도 먹였겠다 누워서 재워야겠다 생각했지만 누우라는 내 말에 하지우는 얕게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뭐 어쩌자고.
- 어지러워···.
일단 아픈 사람이니까 그 자세 글대로 기다렸다. 이대로 잠들면 눕혀서 재울 수 있겠지. 약도 먹었으니 열이 내리긴 할 거고. 불편한 자세 탓에 어깨에 담이 걸릴 것 같았다. 30분이 지났는데 너는 잠이 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열도 내리지 않았다. 너는 계속 뜨거운 숨을 색색거리며 힘 없는 손으로 내 옷을 꾹 잡았다. 옷 끝이 순식간에 땀애 젖었다. 계속 뜨거워지는 몸에서 열기가 계속 흘렀다. 힘겹게 숨을 쉬는 모습이 안쓰러워 네 등을 손으로 쓸었다. 떨리는 숨이 너무 아팠다. 울음 섞인 숨이 너무 아팠다.
몸이 계속 떨려서 고개를 들게 해서 얼굴을 하지우의 얼굴을 보았다. 열이 올라 붉었던 얼굴이 이제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 터진 입술에 붉어진 눈가가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손가락으로 슥슥 쓸었다. 눈가를 쓸던 손가락이 점점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우의 눈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몸이 얼마나 안좋은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무심결에 너에게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손을 떨며 네가 몸을 뒤로 피했다. 괜찮냐고 다가가니 고개를 푹 숙이며 피했다. 억지로 얼굴을 들어 본 너는 입술을 꾹 씹고 있었다. 내가 괜찮냐고 묻자 대답도 없이 입술을 떨었다. 갑자기 현타가 왔나 싶던 순간에 네가 네 손을 입가에 가져다 모아서 입을 벌렸다. 흰 위액이 혀를 타고 줄줄 흘렀다. 그래서 그랬나. 아픈 와중에 더럽다고 생각을 한 하지우가 미련했다. 손을 닦아주고 입가를 내 손으로 문질렀다. 바보야.
내 손길에 풀린 네가 머리를 숙여 내 배에 고개를 박았다. 네 식은땀으로 니트가 젖어가는 걸 느끼며 떨고 있는 너를 달랬다. 그러면서 내 손도 떨리고 있었다. 잔뜩 찡그려 구겨진 네 얼굴 근육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풀었다. 뜨거운 네 몸을 꽉 껴안았던 그 겨울에 너는 나에게 또 구원받았다.
하지우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나름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심장 부근에 귀를 붙였다. 두근두근. 존나 멀쩡하네. 네 땀에 젖은 니트를 벋고 흰 티만 입은 채 거실 소파로 향했다. -같이 잘 순 없으니까.- 집이 너무 넓어서 춥긴 또 존나 추웠다. 아니 거실 난방은 어떻게 키냐고요···. 담요 안에서 떨다가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깨어난 너는 그 새벽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 너기 내 방으로 달려왔잖아.
- 헥헥거리면서.
딱 거기까지. 너가 나에게 기댄 것도, 울었던 것도, 내가 덜 으스러지게 안은 것도 다 잊었다. 그래서 나도 잊기로 했다. 그날 느낀 알 수 없는 감정의 실마리를. 내 손이 떨렸고 나도 눈물이 흐르려 했던 이유를. 네가 사무치게 안쓰러워서 밤새 네가 아프지 않길 간절히 바란 것도 잊었고 또 합리화했다. 구원을 받았으니 적당히 돌려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우리가 어땠는지도 잊고.
다 줄줄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아.
https://curious.quizby.me/ugun…^ 퇴고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