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어머니가 겨울에 말했다. 열심히 노력한 구급대원인 내가 자랑스러우신 모양이다. “사랑해”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나의 약혼녀가 말했다. 이제는 내 부인이다. “넌 사람을 살렸어”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선배가 말했다. 그 믹스 커피와 함께 말하시던 나긋나긋한 목소리. “아저씨는 제 우상이에요” 흰 스케치북을 든 작은 꼬마아이가 내게 말했다. 스케치북에 뭘 그렸을까? 아직도 모른다. “아저씨, 저희 부모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파란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하지만, 널 용서할 수 없어” 마지막 말은 조금 의외였다. 내가 인생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용서라니? 내가 잘못을 했다고? 뭘? 뭔 잘못을 했길래? 난 내 인생 동안 잘못한 게 없어. 착하게는 못 살았어도(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쁘게는 안 살았다고. 용서를 왜 빌어야 하지? 그때, 주변이 검어졌다. 심연이라는 단어를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어둡고, 막막하고, 끝이 없고, 빛 따위는 없고, 희망도 없고, 그것도 없었다. 그것. 입이 턱 막혀 말을 할 수 없는 그것이다. 입에 코르크 마개가 걸린 듯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언어라는 것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헉, 헉“ 난 깨어났다. 주변이 온통 하얬다. 그렇다고 비정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냥 하얀 방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내 본능이 이곳을 거부했다. 아, 여기는 내가 납치 당했고, 이제는 그가 납치 당한 곳이지. 지옥에서 복수의 낙원이 된 곳이지. 나는 본능을 애써 억누르며 방을 걸어갔다. 이제는 마르고 창백해진 초승달 같은 내 다리를 가지고 걸어갔다. 음, 하며 한 걸음, 아, 하며 두 걸음, 걸어갔다. 내가 이걸 여러번 반복하다 보니 벌써 그가 묶인 방으로 도착했다. 그는 온몸이 청색의 박스테이프로 묶여 있었는데, 사슬은 제대로 다루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스테이프조차도 왜소한 체구의 그를 제압하고 묶기에는 나쁘지 않은 도구였다. 그는 움찔거리며 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그 정도로 단단하게 묶인 테이프를 뿌리쳐 낼 수 없는 법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면 좋을 지 고민했다. 그의 추악함을 보는 그들은 그에게 추악함에 당하는 기분을 알려 주기로 했다. “어떻게 복수할까? 우리도 곤봉으로 때려 볼까? 곤봉 다루는 게 쉬워 보이던데”, 젊고 무모해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나보다 몇 살 어려 보였다. 옆에 있는 곤봉을 어설프지만 자신감 있게 휘두르며 말했다. “아니에요. 곤봉으로 괴롭히는 건 너무 약해요. 우릴 굶기고 곤봉과 채찍으로 때린 걸 벌써 잊으셨어요? 채찍을 벌써 잊으셨군요. 더 강해야 되요“, 더 젊고 예의 바른 것 같은 여자가 말했다. 차림새로 보니 비즈니스 우먼 같다. 빼빼 마른 몸에 얇고 찢어진 정장을 입었다. “아, 뭐, 그러면 너가 떠올려 봐“, 다시 젊은 남자가 말했다. 부정 당했다는 마음에 그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제 생각에는 블랙 잭으로 구타 하고, 라이터로 몸을 지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모나미 볼펜도 유용하고요. 이 집은 그가 쓴 무기들과 그를 활용하는 법들을 쓴 책들로 가득해요“, 그 여자가 다시 말했다. “저희….”, 얼굴이 퉁퉁 부은 젊은 여학생이 말했다. “그냥 법적인 처벌을 바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그래요?“ 내 생각에는 그 여고생이 제일 맞는 말을 한 것 같다. ”뭐? 법적인 처벌을 바래? 법이 얼마나 약한 지 나 모르는 구나. 그냥 반성문 쓰고 사죄하면 바로 감형이야. 너가 어려서 모르는 거야“, 젊은 여자가 말했다. ”맞아, 넌 그런 말 할 바에는 차라리 말을 하지 마”, 젊은 남자가 말했다. “아무튼, 저는 저 이에게 더욱 더 감각으로 고통을 주면서도 강한 고통을 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 여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이제 그가 쓴 고문 기법 책들을 확인하러 간다. 그 여자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이 걸음걸이에 담겨져 있었다. 몇분 뒤, 그 여자는 그를 지질 라이터와 고문 기법이 담긴 책을 들고서 다시 우리가 있는 방으로 갔다. 라이터는 길쭉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은 게 그 여자와 닮아 있었다. 이제 그 여자는 라이터를 키려고 했다. 이제 그를 향한 복수가 시작될 테다. 그를 향한 추악하지만 아름다운 복수. 그런데, 복수는 추악하지 않다고 말했던 게 말에 걸린다. 구급 대원으로서의 사명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그를 증오하지만, 그가 밥의 선을 넘은 고통을 받을 자격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그가 딱 그가 법적인 처벌을 받는 거였다. 처벌을 받지 않고 죽는 게 미웠을 뿐이었다. 결코 섬세하면서 감각적인, 추악하면서도 아름다운, 중독되는, 그런 고문이 아니었다. ”저…“, 그림자 같았던 내가 드디어 말을 건냈다. 이제 내 사명과 마음을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 하면 된다. 그냥 조용히, 담담하게, 태연하게. 그런데, 다들 내게로 시선이 갔다. 나를 존경하면서도 따르려는 불편한 눈빛으로. 그들은 그를 제압한 인물에서 악마를 사냥한 인물, 꿈 속의 권성징악 심판자, 등과 같은 판타지들로 가득찬 나를 보았다. 실제로 나에게는 일말의 선함과 평범함만이 존재해 있었다. “저도 여고생 친구 말처럼 법적인 처벌을 바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법적으로 이런 복수는 불법입니다. 저희가 복수를 했다가는 오히려 법적인 처벌을 받을지도 몰라요” “아, 그러세요? 그래서 법적으로 처벌 받아야 한다? 그런게 중요해요? 저희가 감옥에 가더라도 원망스러움은 풀어야 하겠네요. 이건 저희 잘못도 아니고요. 안그래요? 법이 저희를 지킬 수 없고, 그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없다면 저희가 복수 해야죠” 젊은 여자가 말했다. 그 여자의 붉은 안경이 빛났다. “아무튼, 그외 의견 없으시면 고문 하겠습니다” 젊은 여자가 라이터를 꺼내며 말했다. 이제 라이터가 켜지면서 불이 나타났다. 불은 아름다운 몸짓으로 나와 그를 도발하는 동시에 매혹 시켰다. 황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다. 눈을 땔 수 없이 아름답게 일렁이면서 나를 도발하는 저 불! 증오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내 사명을 어기면서도 내가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그 여자를 막으면 나는 그의 편을 든다고 다들 여길것이다. 이제 그 젊은 여자는 그의 납작한 이마 위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일렁이는 불꽃은 그의 이마에 더 빠르게 가려고 라이터 위에서 헤엄쳤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 수천가지의 감정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여자의 복수는 자비가 없었다. 그 여자는 이제 그의 이마에 불을 지졌다. 큰 상처와 흉터가 그의 이마에 남아졌다. 이제 그 젊은 여자는 테이프가 붙은 곳을 제외한 그의 얼굴의 모든 곳을 불로 지졌다. 그의 얼굴은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뒤덮였다. 화상이 나며, 죽음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No love, no mercy” 여고생이 잔뜩 부은 멍이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억양이 너무나도 부드러워 요즘 학생들이 얼마나 영어를 열심히 배우는 지 새삼 실감이 났다. ”인간을 사랑해 봤자 별거 없다고 말한 사람, 용서 받지 못하지요. 그렇게 사랑 받지 못한 사람, 용서 따윈 하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