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기록기를 동기화하다가, 이상한 알림 하나가 떴다.
[Anger Pack: 손실. 복원 불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화 한 번 덜 내고 살면 좋은 거지, 뭐.
커피를 내리면서도 별생각 없었다. 물 끓는 소리가 평소보다 차분하게 들려서 오히려 좋았다.

회사에 도착해 보니 회의실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였고, 누군가는 의자를 끌며 불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늘 그 속에서 화내고, 참아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런 감정이 올라오지 않았다.
억지 같은 지시도 그냥 먼 곳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스쳤다.

“요즘 표정이 안정적인것 같아요ㅎㅎ.”
상사가 내 어깨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기분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냥 공기처럼 가벼웠달까.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이 나에게 점점 많은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너는 화를 안 내니까 말하기 편해.”
“조금만 도와주라. 응?”
말투는 다정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미세한 균열 같은 걸 느꼈다..
예전 같으면 서운하거나 화가 났겠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다.
없으니까, 거절도 안 됐다.

거울을 보던 어느 밤, 나는 깨달았다.
화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눈빛 자체가 희미해져 있었다.
무언가가 비어 있는데, 정확히 뭐가 빠져나간 건지는 가늠이 안 됐다.

감정센터에 찾아가 기록기를 검사해달라고 했을 때, 직원은 단정하게 말했다.
“이상 없습니다. 시스템은 정상이에요.”
하지만 내가 지켜보던 화면에는 분명 작은 흔적이 찍혀 있었다. 남이 건드린 로그.
누군가, 내 분노를 지웠다.
그날 밤 뉴스는 더 잔인했다.
“분노 제거 시범 프로그램, 곧 시민 대상 확대 예정.”
내가 시범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놀랍게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실망도, 두려움도, 화도 없었다.
그저, 나는 ‘아 그렇구나’라는 빈 문장만 가라앉았다.

그러는 사이 감정기록기는 다른 오류들도 띄우기 시작했다.

기쁨 데이터는 파손.
두려움은 불안정.
슬픔은 읽기 실패.

감정들이 하나씩 노래가 끝나기 직전의 잡음처럼 끊겨 나갔다.

어느 날 출근길이었다.
창밖을 보던 중, 기록기가 마지막 경고를 냈다.

[Emotion Core: Shutdown.]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진짜 마지막 감정이 조용한 밤하늘 속에서 꺼지는 느낌이었다.

회사에 도착하니, 동료가 내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
“..진짜 완벽한 시민 같아요. 솔직히 부럽네요.. ㅋㅋ.”

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완벽한 시민. 감정 없는 인간에게 붙이는 이름.

“그래요.?”
입꼬리를 조금 올려보았다. 감정이 없는 미소는 이상하리만큼 쉬웠다.

내 속은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는데, 그 비어 있음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공기만이 조용하게 흔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