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종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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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2 18:36•조회 68•댓글 2•처연
—센, 저것 좀 봐.

마리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푸름을 머금은 그것은 아주아주 커다랬다. 마리의 부름에 센이 뒤를 돌아 마리의 목소리가 울린 방향을 응시했다. 마리가 가리킨 것은 단지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의 정 중앙에 제법 크기가 큰 구멍이 나 있었다. 마리는 그것을 자세히 보려 가까이 다가섰다. 센은 조금 먼 발치에서 마리를 기다렸다.


마리는 구멍을 들여다 보았다. 손으로 나무 기둥을 톡톡 두드려 보기도 하고, 구멍 속에 손을 집어 넣기도 했다. 센은 더운 공기에 연신 셔츠를 팔락거리며 바람을 만들었다. 목까지 기른 울프컷의 머리칼을 왼손으로 정리하며 땀을 뻘뻘 흘려 보냈다. 마리는 잠시 뒤를 돌아 센을 살폈다. 센은 아예 풀 밭에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있었다. 근처 나무 기둥을 등받이 삼아, 손부채질을 해대며 더위를 식혔다.

—마리, 그만 가자.
—잠깐만.
—여긴 너무 더워. 게다가 나는 그것이 보이지 않아.

마리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센에게로 걸어가 멋대로 뻗쳐 눈을 가린 센의 앞머리를 정돈했다. 푸른빛의 머리칼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센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뒷목을 긁었다. 마리가 센의 옆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마리의 갈색 머리카락이 순간적인 바람에 나풀거렸다.


센은 실명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 날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센은 본래 파도처럼 시원한 푸르고 맑은 눈을 가진 아이였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파도가 튀는 듯했다. 그런 센에게는 정말 아끼던 형이 있었다. 센보다 여덟 살이나 더 많은, 어머니는 같지만 서로의 아버지는 모르는 이복형제였다. 센은 형을 사랑했다. 형은 센을 증오했다. 그 결과가 센의 눈으로 증명되었다.


센의 형은 센을 아주 싫어했다. 센이 태어난 후부터 형은 어머니를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모든 마을 사람들의 관심까지도. 센은 작고 아름다웠다. 두 손을 휘휘 저으며 앙탈 부리는 것도, 식사를 할 때면 눈이 반짝거리는 것도 전부. 그렇게 그의 형은 잊혀져 갔고 타락했다. 그는 특히 센의 아름다운 푸른 눈을 싫어했다. 그 눈이 피눈물로 가득 차길 바랐다. 그래서 악독한 짓을 저질렀다. 아무리 센을 증오했어도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이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센. 센?

마리의 목소리가 센의 귀에 들이 닥쳤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마리의 목소리가 울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는 일어나 있었다. 꿈쩍도 않는 센을 두 팔로 낑낑거리며 들어 올린 다음, 천천히 발을 떼었다. 센은 마리의 손을 잡고 마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마리의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센은 편안했다. 사부작사부작. 풀이 센과 마리의 신발에 밟혀 누웠다. 센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리는 센과 함께 깊은 풀숲으로 들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센이 잔디 위로 주저 앉아 숨을 골랐다. 마리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그런 센의 땀을 닦아 주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센은 종종 이러곤 했다. 센은 아예 팔을 벌려 풀 밭에 드러 누웠다. 풀들이 힘없이 휙휙 넘어졌다. 마리는 센의 옆에 따라 누웠다. 울창한 나무가 햇살을 가려 주어 아까보단 하늘을 보는 일이 편했다.


마리는 종종 센의 머리카락을 땋아 주곤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는 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누운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센을 내려다 보았다. 센의 푸르고 검은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어 이리저리 교차시키고 엇갈랐다. 그러고는 치마 주머니에서 빨간색 머리끈을 꺼내 그것을 고정시켰다. 센을 보며 마리는 늘 예쁘다고 웃었다. 센은 그 웃음을 좋아했다. 마리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 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었다.

—센, 있지.
—•••

—우리 떠나지 말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너랑 평생 이런 자연 속에서만 살고 싶어. 아무 걱정없이, 편안하게.

센은 팔을 베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려 마리의 목소리가 울리는 방향을 응시했다. 마리는 웃고 있었지만 센은 보지 못했다. 센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도 마리와 함께 있고는 싶었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숲속을 떠돌 수는 없는 마당이었다. 마리는 도시에 가면 더 잘 살 것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하겠지. 그리고 센은 스리슬쩍 빠져 주면 된다.

—아냐. 우린 떠날 거야.

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리저리 꼬인 머리칼을 정돈하고 풀고 있던 셔츠 맨 위 단추를 엮었다. 마리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감고 있던 센의 눈동자가 스르르 열렸다. 그 안에는, 참혹하게 빛을 잃은 어둠이 가득했다.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동공. 푸름을 머금었던 눈동자는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럴 시간이 없어. 종말은 정말 곧이야.
—하지만•••

마리는 센을 따라 일어섰다. 센의 눈동자를 바라 보았다. 빛을 잃은 그 어둠속을.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마리는 센이 행복하길 바랐다. 센 역시 마리가 행복하길 바랐다. 둘은 서로의 행복을 빌었다. 정작 자신은 어떻게 되든 하나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센은 마리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마리는 센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덧)
한시라도 빨리 올리고 싶은 마음에 인사도 없이 급하게 달려왔네요. 첫 중편 소설인만큼 부디 재밌게 읽어 내려 주시길.


https://curious.quizby.me/tC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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