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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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8 09:01조회 47댓글 2이련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의 필름 사진 한 장이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나왔다. 시간을 견뎌낸 종이는 모서리가 바래고 빛이 바랬지만, 그 안에 갇힌 우리의 미소만은 여전히 쨍하게 살아 있었다.

사진 속 우리는 스무 살의 여름이었다. 낡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어설프게 브이를 그리고 있는 네 모습. 염색이 덜 빠진 오렌지색 머리카락,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얇은 청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대책 없는 믿음이 가득했던 눈빛.

우리는 매일 밤,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새벽을 채웠다. 너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영화감독이 될 거야" 라고 했고, 나는"모든 방랑자를 위한 카페를 열어야지.” 고 말했다. 그때 우리의 말들은 모두 대단한 마법 주문 같았다. 현실의 두려움, 돈, 성공 같은 차가운 단어들은 우리의 대화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시간은 그 대책 없던 약속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를 각자의 자리로 멀리 밀어냈다. 너는 치열한 현실 속에서 필름 대신 차가운 숫자를 다루는 직업을 택했고, 나는 방랑자를 위한 카페 대신 남들처럼 안정적인 아침 출근을 준비한다. 화려했던 마법 주문은 일상의 소음에 묻혀 희미해졌다.

사진 속 너의 오렌지색 머리는 검게 변했고, 내 어깨 위에는 스무 살의 경쾌함 대신 삶의 무게가 얹혀 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때 우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방향을 바꾼 것뿐이라는 것을. 영화감독이 되지 못한 너의 상상력은 여전히 기획서 속에서 반짝이고, 카페 주인이 되지 못한 나의 감성은 팍팍한 하루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아낸다.

우리가 그토록 굳게 믿었던 '영원한 청춘'은 없었다.
청춘은 변하고, 꿈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그러나 이 낡은 사진 한 장은 여전히 말해준다. 변해버린 우리 속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뜨거운 순간 자체는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남아있다고, 그 열기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눈부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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