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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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2 07:42조회 14댓글 0여우비
방학이 이렇게 짧았던가. 어느새 우린 3학년이 되어 있었다. 너와 나는 또 같은 반. 애초에 반이 세 개씩 밖에 없는 작은 학교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3학년이라는 교실 앞 팻말이 와 닿지 않았다. 하나도 안 믿겼다. 여전히 나는 방황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간다. 글쎄.

오늘따라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이 났다. 학교에서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는 왜 죽은 네 형 얘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는 걸까. 물론 나도 안다. 꺼낼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며칠 전 네 집에 문병을 갔던 일이 생각이 났다. 네 집엔 사진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 많은 사진 중 네 형의 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치 원래 형의 존재는 없었다는 듯, 아무도 그 사실을 개의치하지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까 봐.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할까 봐.

그때 누군가 나의 자리로 다가왔다. 여자애였다. 나는 평소에 누군가의 이름을 외워 두지 않는다. 어차피 지나가버릴 아이들이기에 굳이 외우려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고. 아, 너는 예외이다. 너만은 죽을 때까지도 기억할 것이다. 무튼 여자애는 내게 무어라 말을 쏟아 내었다. 싱글벙글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여름이 너, 혹시 주말에 뭐 해?”

“그건 왜?”

“주말에 남녀 모아서 홍대 갈 건데, 너도 오면 좋을 것 같아서. 괜찮아. 다 우리반 애들이야.”

“미안. 난 못 갈 것 같아.”

반 아이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 무슨 수로. 당장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애 이름도 도통 모르겠다. 물론 아직 학기초이긴 하지만, 이 여자애는 내 이름을 벌써 외웠나 보다. 잘 돌려서 거절할 수밖에.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말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네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투명한 눈동자로 응시한다.

“헐. 오면 좋을 텐데. 무슨 일 있어?”

그렇지만 나는 당장 내 앞에 서 있는 이 아이와의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말을 뱉어 냈다.

“할머니댁에 가야 해서. 미안해.”

여자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꾸한 채 자리로 돌아갔다. 곧이어 웃음 소리가 들렸다. 너였다. 네가 날 보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너는 내 시선과 발걸음을 모르는 채 휘파람을 불어 댔다. 왠지 기분이 별로였다. 너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왜 웃어.”
“내가 뭘?”

“아까 나 보고 웃었잖아.”

“할머니댁. 아하하하. 네가 할머니댁에 간다고? 네가? 웃겨라.”

너는 재밌는 쇼를 한 편 본 것 마냥 깔깔거렸다. 나는 굳어지는 표정을 애써 풀었다. 네 머리통을 툭하고 쳤다. 너는 순식간에 맞았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웃긴지 한참을 키득거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머니댁에 간 게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외국에 사셨다. 여행을 사랑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계신다. 그런데 할머니댁에 다녀 온다니, 네가 생각하면 웃길 만하다.

“참 나, 이게 그렇게 우습냐?”

“어. 존나 웃겨. 푸흐흐.”

너는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눈을 한껏 휘었다. 나는 싫은 티를 내면서도 속으론 꽤 좋아했다. 웃는 게 예뻐서, 라고 마음에 둘러대기로 했다.


*


따뜻한 봄이 오는 걸 넌 달가워 할까. 요즘따라 자꾸만 궁금증이 늘어간다. 너는 날 귀찮다는 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그저 춥기만 하니까.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맑든 추우니까. 다른 계절처럼 변동이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추운 날씨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나는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날씨는 하나의 기쁨이자, 재미였다.

너를 떨쳐내려고 해도 너는 자꾸 떠오른다. 3학년이나 되었으면 이제 공부에 완전히 집중해야 할 시기인데도. 막상 너는 늘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도 않는다. 이러니 딴 생각을 할 수밖에. 너는 알까. 누군가 때문에 애태우고 기다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마음. 아마 모르겠지, 여길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저려온다. 아프다, 아파. 몰라준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아프다.

3월이나 되었지만 아직 쌀쌀하다. 꽃샘추위인지 그냥 겨울이 덜 간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무마다 새순이 돋았지만 꽃은 아직이다. 아파트 단지를 빙 둘러 나 있는 벚나무는 막 꽃이 피려고 하고 있다. 작년 봄엔 꽃구경을 하지 못 했는데, 올해는 해볼 생각이다.

“꽃놀이 가봤냐?”

“응, 엄마랑.”

너는 무언가에 열중해 있었다. 대답도 건성으로 쑥쑥 내뱉었다.

“올해는 아직이지?”

“아직 꽃도 안 폈는데 뭘.”

“그러게.”

“왜?”

“너 토요일에 뭐 하냐?”

너는 열중하던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깜빡거리며 응시하는 네가 웃겨서 픽하고 웃었다.

“꽃 보러 갈래?”

“…….”

“남자들끼리 가면 좀 별론가?”

“가자.”

나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손끝이 아렸다.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반 장난으로 물은 것이었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이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노추 오랜만에-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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