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여자애의 무대는 주로 능소화가 만개한 담장과 멍이 든 파랑, 찰―칵하는 외딴 별의 소리가 익숙하게 들리게끔 꾸며진 어떤 찬란
당연하지 않단 걸 알면서도 소다 거품 올라오는 여름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 젊음의 자부심과 아직 사랑하는 파랑의 탓이다. 지구별은 사랑을 직접적으로 내뱉기에 미성숙하니 소다수에 빠져 뻐끔거리는 입술들이 지구별 사랑의 발음과 흡사하다. 소년의 흰 발밑이 언젠가부터 매끄러운 유리와 뽀글대는 소다.
소다에 빠지기를 삼가주세요.
사랑에 빠지기를 삼가주세요.
사랑에 빠지는 것은 마치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들린다.
역시 여름은 거지 같아. 여자애는 올여름 이 말을 염불처럼 외고 다닐 게 분명하다. 매일이 같은 거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오늘은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한 소년과 여자애의 항상, 이들은 위험을 찾아 나서지만 가녀린 유리 밑이 소다로 가득하다는 것을 모른다.
여자애의 턱을 따라, 뺨을 따라 땀이 흘러내린다. 그늘 없는 땡볕 아래 소년은 더운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여름을 잔뜩 먹어버린 카메라 셔터를 만지작댄다. 분하게도 여름은 청량하고 어여쁘다. 여자애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여름의 총애를 받는 그 아이는 하릴없이 함께해야 하는 안타까운 운명인 것이다. 물론 여자애는 궁상맞은 운명 따위 믿지 않는다. 본디 이 정도로 괴팍한 성격은 아니었건만, 여름 탓에 부쩍 짜증이 는다.
퍼런 하늘 담다 보니 달력 한 장이 넘어간다.
여름 방학 같은 건 소년과 여자애에게 중대 사항이 아니었다. 몇 안 되는 차이점이라곤··· 시간이 조금 더 넉넉해졌다는 것과 카메라 필름을 더 자주 갈게 됐다는 것. 매미 소리를 신경 쓰게 될 만큼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 그럼에도 소년은 좋다고 셔터를 눌러대고 있으니 여자애는 진절머리가 난다. 나무 평상에 널브러져 땀과 소다 향이 어지러이 섞인다. 여자애는 눈을 두어 번 끔뻑이다 그것마저 멈춰버린다.
- 더워?
소년은 태연한 얼굴로 웃는다. 듣지 않아도 될 것, 들어야 할 것 닥치는 대로 소리가 전부 들린다. 푸른 잎이 흔들리면 파도 같은 소리를 만들더라.
- 너는 진짜 지구 사람이 아닐 거야···. 땀 하나 안 흘릴 수 있나.
소년은 말없이 셔터를 누른다. 땀에 절어 시큼한 소다 향이 나는 여름날 사진, 소년도 평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든다. 소년은 하늘 너머 우주 너머 먼 푸른 별의 거리를 가늠하듯 눈을 찌푸린다. 고요해진 어느 여름날과 흔들리는 파도 소리가 번갈아 울렁이고 어느새 소년의 시선은 내리깐 여자애의 속눈썹으로 향한다.
···.
소년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 아주 붉고 부끄러운 말. 사랑한다는 것들에게 할법한 촌스러운 지구의 말. 소년은 붉어지는 피부를 감추려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린다. 검푸른 머리칼이 세차게 흔들린다.
여름날 여자애는 예쁘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년의 뺨이 거듭 붉어진다는 것. 더위 탓은 아니다. 소년은··· 이제 얼버무릴 변명거리가 없다. 여자애는 몰아치는 더위에 소년의 안색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테지만 소년에게는 비상도 이런 비상이 없다.
//
6월 28일, 기록
오늘의 무대는 바다. 버스는 꽤나 오래 달려, 나와 그 애를 밤바다에 내려주었다. 해 질 녘쯤의 E를 보고 싶었는데, 서두를 걸―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슬픈 이야기!
···E는 오늘 나에게 곤란한 질문을 했다. 글쎄, 네가 나의 사진을 보게 되는 것은 아주 나중의 일. 나중으로 미뤄버린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 텐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E는 나를 미워할까요? 참 질문을 해도 답해줄 이 하나 없으니. 그렇다고 나의 괜한 사상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터였다.
(사실 그런 것보다 내 사진에는 E에 대한 사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보여줬다가는 수치사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누군가 사진에 마음 담지 않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오버.)
7월 1일, 기록
오늘 무대는 E네 할머님 마당을 빌려서. 달이 바뀌며 날씨가 부쩍 더워진 탓에 E는 정신을 못 차리는 중. 뭐, 그런 E도 아름다웠기에 필름에 잔뜩 담았다. 매년 생각하는 거지만 여름과 E는 위험한 조합인 듯. 방학. 이제 곧 방학이 되면 여름 낮과 밤의 E를 전부 찍어볼 수 있겠지. 어떤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내 심장은 남아나지 않을 수도. 가령 내가 심장 터져 죽는다면 이 일지를 펼쳐 모두 E의 탓으로 돌려주시기를. (웃음)
사실 오늘은 조금 위험했다. E의 속눈썹은 잔인할 정도로 예뻤다. 아 정말, 단단히 큰일이다. 나는 위험을 감지했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아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올 테면 와라, 물론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오거라. (이것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기에 회수가 가능한 것으로 칩시다, 우리!)
이만 밤이 깊어 갑니다. 나는 오래오래 E를 생각하며 잠에 들겠죠.
https://curious.quizby.me/ou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