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6 10:35•조회 35•댓글 1•Garri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피투성이 설원 위 저주 받은 공작 부인처럼 끝까지 죽음 앞에 삶을 재로 태우고 싶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거리라, 죽음이란 영원한 잠 앞에 폭발하리라, 이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짐승 한 마리가 불 타도 신경 쓰지 않을 인간들 주제에 털 없는 짐승 하나에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인간의 욕망인 지배 당하고 노예가 되는 것은 제가 가장 이해 못하는 일입니다. 소속 되는 것, 본능의 이끌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 그것들은 전부 제게 한낱 악마의 백일몽이었습니다. 몽환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인생의 노예로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의 무생물, 무기질로서 살고 싶었습니다. 제가 하나의 무기물이 되어, 정체 없는 것이 되어, 소속 될 것도 지배 될 것도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제게 유일한 구원은 시체의 춤이었습니다. 제 몸 안에 있는 죽어가는 시체들을 이리 저리 움직이며 하나의 형상을 만듭니다. 검은 시체와 푸른 시체가 한 데 모여 해골의 눈을 만듭니다. 검은 재가 되어 버린 시체들은 음영을 만들어 냅니다. 검은 곳 군데 군데 연하게 피어 오르는 검은 재들은 전부 또다른 형상이 있었을 텝니다. 그 형상이 희미해 질 때 원망할 것은 없었습니다. 봄의 노란 꽃이 황금 아닌 점액 될 때 사랑을 노래하리라, 해골이 외칠 겁니다.
기교 없는 기교로 우왕좌왕 움직이는 인간의 흐릿한 잔상은 도시에만 있을 뿐입니다. 신호등 사이 인간이 걸어 다니는 땅 아래 지하수가 말라갈 때, 봉기의 평야는 살아 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노동하고자, 지배 당하고자 하는 인간들은 노예의 잔상을 계속 품어 나갑니다. 그 잔상이 현실이 되어 갈 때까지 품어 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유라는 사막의 메마른 평야는 멕시코와 미국 사이 어느 존재하지 않는 국경선에서 증발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지배 당하지 않고 시체와 함께 사라지고픈 인간일 뿐입니다. 제가 죽으면 제 시체를 바다에 놓으세요. 어른거리는 수면 아래 세계의 의미를 거부한 무질서는 죽어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