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하청 (百年河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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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5 03:46조회 78댓글 4유하계
백년하청 (百年河淸)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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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삼켰다. 너와 나의, 하얀 세상 속에서 우리가 나눴던 사랑을 잘게 씹고, 또 곱씹다 이내 삼켜버렸다. 아, 드디어 삼켰다···. 이윽고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좋았다. 그리고 그 쾌감 후에는 외로움이 미치도록 들었다. 사랑은 내 이를 썩게 했다. 내 혀를 무디게 만들었으며, 입천장을 태웠다. 이내 내 속을 썩힌 우리의 사랑은 내 몸 속 아주 깊은 곳에서 조용히, 고독하게··· 잠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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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계 - 백년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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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말 그대로 하얀 세상이였다. 눈이 소복히 내린 우리 둘 뿐인 세상이 낭만적이였다. 하얀 세상 속 너의 짙은 검정색 머리에 내려앉은 눈들이 부러울 정도로, 너는··· 너무 아름다웠다. 어떻게든 닿아있고 싶었는데 넌 그걸 허락해주질 않았다. 그간 네게 선을 그었던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였던건지, 역시 선을 그었던 건 너였던건지··· 오랜만에 만난 우리였음에도 네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그런 네가 미워서 나는 뭐라고 말 좀 해보라며 툴툴댔다.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크리스마스도 너와 같이 보낼 수 있었을까···, 거리는 낭만적인 캐롤과 시끄러운 연인들의 웃음소리로 가득차있었다. 밝게 빛나는 조명들과,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그 앞에서 우리는 세상에 둘 뿐인것처럼, 모든게 모자이크처리가 된 것처럼··· 오직 서로의 숨결을 의식하고만 있었다. 너는 내 말에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네 머리에 하얗게 내린 눈을 가볍게 털어내고 입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추위를 녹이기 위해 내가 잡고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려놓은채로.

“헤어질까?”

예상한 너의 말이었다.
예상한 이별통보, 예상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예상한··· 아주 많은, 연인들. 모든 연인들 또한 세상에 그들뿐인 것마냥 굴어댔다. 그래도 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 곁엔 네가 있었으니까, 근데 그런 네가 지금 날 떠난단다. 너가 어떻게 그래. 너가, 너가 어떻게.

“이제 좀 지친다. 그만하자.”

내 모든게 좋다던 너였다. 뾰로통한 표정부터, 살짝 내려가있는 입꼬리, 조용한 입술, 항상 바닥을 향해있던 시선까지··· 모든게 어색했던 나의 그 모든걸 사랑해주었던 네가, 내가 지친다고 말했다. 그 충격에 휩싸여 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온세상의 연인들이 함께 밤을 보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밤. 어쩜 너는 하필 이 날에 이별을 고하는거니. 이것도 네 못난··· 널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세운 계획이야? 차라리 그런거였으면 좋겠어. 널 기억하는 건 아주 쉽고, 아주 아름다운데다가··· 또 행복할테니까.

“왜, 왜··· 갑자기? 너무 갑자기잖아. 그렇지 않아···?”

“미안해. ···택시라도 잡아줄까?”

항상 넌 나를 바래다주려 택시를 잡아주었다. 나는 항상 너와 만나는 이 곳에서 좀 먼 곳에 살았기에, 네가 택시를 잡아주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 일이 이젠 당연하지 않아질 것이었다. 항상 내가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점점 멀어져가는 택시 번호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너 또한 당연하지 않아질 것이었다. 번호판 번호를 외우곤, 내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할 때까지 메모장에 택시 번호판 번호를 적어두던 너도, 항상 잘자부터 잘잤냐는 인사까지 늘 내 곁을 채워주던 너도··· 다 당연하지 않아질거란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충분히 눈물을 토해내고 있었는데도, 눈물은 멈출 기색이 안보였다.

“날 사랑하지 않았던거야?”

“···알잖아. 아니라는거. 널 사랑했다는거 그거 하나는 사실이야···. 이젠 너랑 있는게 하나도 설레지가 않아. 오래 너 못 보는게 아쉽지도 않고, 너 택시 잡아줄 때마다 택시가 오질 않길 바라는게 아니라 이젠 택시가 빨리 오길 바라는게 느껴져. 널 사랑했던 건 분명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미안해.”

네 이름. 그 이름은 내게 허락된 유일한 믿음이었으므로, 나는 밤이 될 때면 혼잣말로 네 이름을 중얼거리고는 했다. 언제나 네가 보고싶어질때면, 외로울때면, 행복할때면··· 모든 순간에는 너가 있었다. 모든 순간에 네 이름을 불러댔다. 그 이름을 이제 못 부르게 됐다. 그 이름을 불러도 네가 달려오지 않았다.

택시가 오고 내가 이내 너를 떠나게 됐던 그날 밤. 마지막까지 네 이름을 불렀지만 넌 대답하지 않았고, 넌 내 이름을 부르며 잘가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나보고 도착해서 연락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조심히 가라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택시 안에서까지 뒤를 돌아봤지만, 너는 이제 내가 탄 택시 번호판의 번호를 보지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 혼자 울었고, 나 혼자 고통스러워했고, 나 혼자. 모든 게 나 혼자였다. 외로운데 이 외로움을 채워줄 사람이 없었다. 사랑을 씹어먹고 썩은 이가 아려왔고 태워진 입천장이 쓰렸다. 짜디 짠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닦지는 않았다. 닦아도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필요 없다고 느껴졌다.

이제 네게 잘 보일 필요도 없는데, 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우는 꼴을 보이는 것도··· 뭐가 중요하겠어. 이제 예뻐보일 필요가 없다.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의 명분이 사라진 셈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괜찮아 진다지만, 너와의 추억만큼은 미래의 내가 웃으며 얘기하고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게 있어서 네 존재는 그랬다.

하얀 날 밤의 택시 안에서, 나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엉엉 울었다. 널 다시 만날 수 없다는게, 일상 속 작은 당연함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게 죽을만큼 고통스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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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좋은 밤 보내세용
네온고요익애언니글기대만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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