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6 21:32•조회 38•댓글 1•원
매서운 찬바람이 예리한 칼날처럼 몰아쳐 한 줄기 여린 새싹은 나무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무야 그래도 버티며 기다릴 수 있다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었다.
가장 혹독한 지역에서는 소와 양 등 가축이 얼어 죽고, 가을에 파종한 겨울 밀도 겨울 가뭄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모자란 농민들의 처지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었고, 기근은 코앞까지 다가와 생명을 위협했다. 그런데도 조정의 세금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했다.
결국엔 봉토가 대연 서남쪽에 있던 주왕이 민심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주변의 주부들은 순식 간에 벌집을 쑤신 듯 혼란에 빠졌고, 반군이 들 이닥치기 전 앞다투어 달아났다.
— 도망쳐라! 반군이 쳐들어온다!
— 저들은 살인에 방화에 못 하는 짓이 없어! 아
주 지독한 놈들이야!
— 사람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며, 가죽까지 벗긴다고 한다!
곳곳에서 유언비어가 떠돌고, 공포에 찬 소식 들이 삽시간에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관도변에 자리 잡은 서가촌은 더욱 민심이 흉흉해졌다.
서가촌의 많은 이들이 이미 살림살이를 정리 하고, 식구들을 챙겨 피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의 한 집만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안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그치지 않았다.
— 안 간다! 나는 못 가! 내가 반평생 살며 별에 별꼴을 다 봤는데, 이 쪼끄만 촌 동네에 무슨 반군이 들이닥친단 거냐!
담장에 걸린 나무 사다리 위에서 웬 노파자 차림의 여인이 꺼이꺼이 울부짖으며 허공에 낫을 휘둘렀다. 저 서슬 퍼런 눈빛을 보면 당장이라도 반군들과 맞붙어 필사의 결투라도 할 기세였다.
마당에서는 두꺼운 솜옷을 껴입은 젊은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 어머니, 제발 내려오세요! 정말 난리가 났다고요. 그 반군들은 사람만 보면 가차 없이 죽인 다잖아요!
— 올 테면 오라지? 내 이 목숨 내걸고 붙어 볼 테다
여인이 낫을 휘두르자 담장의 흙 한 줌이 허공에 흩날리며 흙먼지가 폴폴 날렸다. 옆에 있는 배가 불룩 나온 어린 며느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난리다. 난리도 정말 이런 난리가 없었다.
바닥에 무릎 꿇은 서이서는 애가 타서 눈까지 벌겋게 충혈이 되었으면서도,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다. 집안을 주재하는 사람이 어머니라고는 하지만, 군란이 인 지금 모두가 도망치는 마당에 어머니만 남겠다고 버티고 있으니 이걸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마당 한쪽에는 또 다른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바람을 막아 주는 사의를 입고 머리에는 초모를 눌러쓴 채, 속에는 누더기 솜옷과 해진 솜바지를 입고 있었다. 드러난 가느다란 종아리는 얼어서 파래졌고, 길고 갸름한 얼굴은 추위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도 짙은 눈썹 아래 자리한 그 두 눈만큼은 깊고 심오한 빛을 번득였다.
소년은 사다리 위에서 날뛰는 노파자를 쳐다 보지도 않았다. 그저 얼굴을 어둡게 굳힌 채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마당 이리저리 나뒹구는 상과 의자들을 차갑게 노려볼 뿐이었다.
저 빌어먹을 여자는 평소에 재물이라면 목숨보다 중히 여긴 걸로도 모자라서, 지금 반군이 코앞까지 닥친 위기 상황인데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고 값도 안 나가는 고물들을 지키겠다며 모두를 위험에 떠밀고 있었다.
소년이 입술 사이로 불만을 짓이겼다.
그 여인은 한참을 악다구니를 쓰다가, 아들과 며느리 모두 찍소리도 못하자 김이 빠졌는지 시선을 홱 돌렸다. 그러다 마침 빼빼 마른 소년이 시야에 들어오자 또 참지 못하고 욕을 쏟아냈다.
— 너처럼 재수 없는 놈이 굴러들어 와서 작년 겨울이 이상하리만치 추운 거였어! 멀쩡하던 우리 새끼 돼지들이 통째로 얼어 죽었다고! 이 재수 없는 놈!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전부 다 너 때문이야
소년은 이미 이런 말도 안 되는 악담에 무뎌진 지 오래였다. 마당의 다른 사람들 역시 그녀의 비난에 익숙해진 듯했다. 여인은 신이 나서 욕을 퍼붓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얼음장처럼 빳빳하게 굳은 몸이 사다리에서 고꾸라지더니 머리가 담 모퉁이에 쿵— 부딪혔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하얀 거품이 터져 나왔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뭐야?
뭐지?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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