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내가 정말 널 사랑하는 줄 알았어?"
바닥엔 흥건한 피가 흘렀고, 잔인한 그의 칼날이 매섭게 빛났다. 나를 사랑하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나를 죽이려는 폭군만이 남아있었다. 절망의 구렁쇠 속에 그는 내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어림없는 소리, 순진한 여자야."
그렇게 차가운 죽음을 맞이한 내가 눈을 떴다. 그러나 내 속에 남은 절망은 여전했다. 뜰 수 없는 눈을 뜬 내 눈에 비친 것은 나의 모습,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이거.. 아르텔 아니야? '장미는 피어난다' 여주!"
나와 전혀 다른 말투,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분명 나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죽은 내가 눈을 뜬것도, 그런 내 눈에 내가 보인다는 것도. 천천히 내게 다가갔다.
"..그렇게 죽을 순 없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가까이 다가가도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의 끝에 내가, 아니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마치 나의 기억을 가진 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 공작과의 약혼은 절대! 절대 피할 거야!"
공작과의 약혼을 피하겠다.. 나는 분명 그와 약혼했는데. 그녀는 약혼을 하기 전의 시간선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미 지난 시간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어.
"아르텔 님, 주인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혼란은 가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주변인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답한다. 저 사람은 내가 맞는 걸까? 내가 맞다면 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의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지?
"아버지, 어머니. 저 약혼하기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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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삶은 지켜볼수록 가관이었다. 그와의 약혼을 단번에 파하고, 악녀라는 소문을 기로 찍어 누르며,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절대 나와 시간을 보내지 않던 그가 그녀에게 구애하고 있다.
"어디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어? 얼굴은 아닐 테고."
"그냥 당신이 마음에 안 드니까, 꼬리 치지 말아요."
나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 분명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어딘가 다르다. 그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신뢰받고 있다. 한마디로 내가 바라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르텔, 부디 네가 행복하길 바라."
그녀는 매일 밤 '아르텔, 부디 네가 행복하길 바라.' 하고 기도하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내 삶의 주인공은 이미 그녀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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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의 후, 주인공의 행방은 어디로
데칼코마니 : 무언가를 옮기거나 복사하다
https://curious.quizby.me/d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