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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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3 21:01조회 36댓글 1세리아
재업 죄송합니다 소겟 삭제됐을 때 큐리에 올렸던 글인데 닉네임을 안 적었던 것 같아서 지금 다시 올립니다






술 세 말 마시고 해롱거렸다. 오늘따라 왜인지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져 평소보다 더 많이 적셨다. 함께 마시고 싶은 친구가 있었는데 집까지 찾아가 놓곤 대문에서 망설이다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창밖으로 비춘 그림자가 붓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칠 것이라더니 그 이후로 인물됨이 바뀌어 가끔은 정말 저이가 내 친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강 앞에 서서 푸우 한숨을 쉬었다. 별로 깊어 보이지도 않는 강엔 웬 나룻배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대충 보니 뱃사공이 두고 간 배인 듯 싶었다. 난 염치도 없이 배 위에 올라타선 술병에 입을 갖다 댔다. 오늘따라 달빛이 훤한 듯해 왜인지 반가웠다.

노를 들고 천천히 땅을 짚어 깊은 강으로 나섰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배에 올라탄 지도,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깊은 곳으로 향했다. 즉석에서 지어낸 음률로 멍하니 노랠 부르다가 배에 몸을 기대어 누웠다. 저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술병을 손에 쥔 채 강물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달도 배도 시도 있으니 외롭지 않다. 술은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고 이 한순간만큼은 오롯이 나 자신과 행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삶이 각박하고 인생이 무료하니 술을 벗으로 삼겠다.


月下獨酌 월하독작

花間一壺酒,獨酌無相親。
꽃 아래에서 한 병 술 홀로 마시며 서로 친한 이 없다네
舉杯邀明月,對影成三人。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를 대하여 세 사람 되었구나
月既不解飲,影徒隨我身。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만 한갓 내 몸 따르누나
暫伴月將影,行樂須及春。
잠시 달과 그림자 짝하니 행락은 모름지기 봄철에 맞추고
我歌月裴回,我舞影零亂。
내가 노래하면 달은 배회하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어지러워
醒時同交歡,醉後各分散。
깨어서는 함께 사귀나 취한 뒤에는 각기 흩어진다오
永結無情遊,相期邈雲漢。
무정한 놀이 길이 맺어 먼 은하수 두고 서로 기약하노라


시를 읊는 어린 음색은 어느샌가 흩어지고 결국 남은 건 술뿐이었다. 난 남은 걸 모두 입에 쏟아붓고 청명한 술병을 얼굴에 비췄다. 달빛이 술병 속에서 어지러이 흩어지며 난반사했다. 초현실적이게도 다 마신 술병에 비친 건 내 얼굴이 아닌 처음 보는 꽃 무리였다. 그 꽃 무리들이 너무도 생생하여 마치 당장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술병을 더 세게 쥐었다. 쨍그랑 소리라도 나길 빌었는데 손아귀 힘이 약해서인지 그저 술병을 손에 놓칠 뿐이었다. 허둥지둥 다시 술병을 바라보니 더 이상 꽃은 없었다. 검은 배경과 술에 취한 내 그림자만 아른거릴 뿐······.

자리에서 일어나 강물을 보았다. 아스라이 흘러가는 윤슬들에 강가에 비친 달이 요동쳤다. 왜인지 허무한 감정이 들었다. 모든 것이 내 눈에 있고 심장에 있음에도 아무 것에도 닿을 수 없다는 막연한 허무함이 파도처럼 덮친다. 모든 것이 실존하지만 실존하지 않고 볼 수 있지만 닿을 수 없다. 유일한 친우는 방에 틀어박혀 끝을 알 수 없는 붓질에 열중하고 나는 한량처럼 강에 누워 달과 소통하는구나. 달은 내 모든 모습을 비추지만 천장에 가려진 친우에게는 닿지 못하겠지. 당신이 달빛을 마주할 때 내 수치마저 당신에게 닿을까 두렵다.

아아, 鏡花水月이구나. 月下獨酌하여 깨질 듯한 술병을 들고 달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 달에게 술병을 내밀며 그와 건배한다. 세상이 내게, 네게, 우리에게 삶을 바치는구나.

술에 취해 내가 존재하는지 네가 존재하는지 알 수도 없다.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天地既愛酒, 愛酒不愧天。
醉後失天地, 兀然就孤枕。不知有吾身, 此樂最爲甚。

내 발밑에 보이는 달이 믿을 수 없도록 아름답다. 한때 흐릿하기도 온 세상을 비출 것처럼 밝기도 한 달은 어느샌가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저것을 모조리 삼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난 술김에 홀리듯이 내가 발 딛고 선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퐁당 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물결에 휩쓸려 달이 사라진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달이 아니야. 달이 아니었어. 그저 강에 비친 달의 그림자일 뿐이다.



난 달에 닿을 수 없어.







아아, 더 이상 숨이.







且須飲美酒,乘月醉高臺。
모름지기 좋은 술 마셨거늘 높은 누대에 치달아 달빛 보며 취해 보리라.
― 月下獨酌 四首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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