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이 맺혔어. 꽃이 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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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8 00:03조회 25댓글 0세리아
이슬이 맺혔어. 꽃이 우는 걸까?

아침 일찍 일어나 꽃에 맺힌 이슬을 보며 말도 안 되는 허상을 중얼거리던 그 아이는 운명을 믿었다. 언젠가 자신의 운명이 나타날 것이라고 내게 항상 말하곤 했다. 나는 솔직히 운명 같은 건 유사과학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나에게는 너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넌 날 보면서도 아직 만나지 않은 운명을 읊었다. 그래서 더 운명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운명이 나타난다면 나는 너에게 찬밥 신세일 테니까.

너는 죄다 너와 닮은 식물만 좋아했다. 여름이 막 지나가던 날, 너는 뒷산에서 꽃을 구경하다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에 온몸이 젖어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렸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던 네 말과는 달리 가을이 지나감에도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유독 아팠던 그날 밤 너는 처음으로 울었다. 아파서, 두려워서 운 게 아니었다. 너는 자신의 신념이 무너질까 봐 울고 있었다.

있잖아, 어쩌면 우리의 운명은 죽음일지도 모르겠어. 항상 우리 곁에 있고, 딱 한 번뿐이지만 언젠간 만나잖아. ······근데 정말 그런 거라면 되게 슬프지 않니.

너는 단칸방에 누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억지로 미소 지었다. 날 위로해 주기 위해 네가 무리하는 걸까 봐 나는 서둘러 네 이마 위 물수건을 새로 갈아주었다. 녀의 새빨갛게 달아온 얼굴에 차가운 물기가 흘렀다. 그 물은 곧 눈물처럼 뜨거워졌다. 이런 말 하기 두렵지만, 너는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 같이 보였다. 그걸 너도 느꼈는지, 어느 날은 작은 물뿌리개를 장만하여 머리맡에 두더니,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며, 그렇다면 우린 결국 꽃이 될까?

나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죽는다면 우리 집 뒷산에 묻어 줘. 그리고 가끔 가뭄이 들면 이 물뿌리개로 내 몸을 적셔줬으면 좋겠어. 언젠가 내가 흙이 된다면 그 위에 꽃이 필 수 있도록······.

그리고 정확하게 그날 밤, 너는 눈물인지 땀인지 내가 적신 뜨거워진 물인지 모를 무언가를 밤새도록 흘리며 다음 날 아침 더는 눈을 뜨지 못했다.

유언대로 너는 뒷산에 묻혔다. 하늘은 네 죽음을 애도하듯 며칠간 비를 쏟아냈고, 이내 눈물샘이 모두 마른 듯 몇 달간 내리 울지 않았다. 나는 내가 먹을 물을 조금씩 아껴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뒷산을 향했다. 언젠가 곧게 개화할 네 새로운 몸을 기다리며 물을 줬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벌초하러 간 나는 흙 위에 핀 작은 줄기를 마주했다. 작은 가시를 가진 줄기는 몸을 꼿꼿하게 핀 채로 보란 듯이 서 있었다. 몸을 보호하는 작은 가시가 다이아몬드 갑옷이라도 된다는 듯, 무덤의 최고봉에서 당당하게 몸을 드러냈다. 나는 줄기에 물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꽃이 폈다. 능소화였다. 고작 하나였던 그 꽃은 점점 제 영역을 넓혀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작은 뒷산을 가득 채웠다. 그 능소화가 담장을 넘어 내 뒤통수를 찔렀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너를 떠올렸다. 죽음 뒤의 너를 떠올렸다. 다시 내게, 꽃이 되어 돌아온 너를 떠올렸다.

덫에 피어난 능소화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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