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urious.quizby.me/zeoz…잠에서 깬 노아는 어쩐지 방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바뀐 건 하나도 없는데, 방 안의 공기마저 낯선 이질감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처음엔 피로 때문이라 여겼지만, 그 기분은 더 깊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감정의 요동을 멈추지 못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생각하는 말을 잃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문장이 떠다녔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온전히 그를 대표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보았다. 딱딱한 바닥에 얇은 요, 약간 삭은 배게, 옅은 황토색 이 불, 그리고 펜과 종이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갑자기 두통과 현기증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머리에선 벌레가 사각사각 신경을 긁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던 노아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흙을 머금고 덕지덕지 눌어붙어 마지막 호흡을 찬 공기에 맡기고 있었다. 살을 에는 바람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얼어붙은 하천 다리 아래쪽엔 오리 두 마리가 기웃거렸다. 노아는 한참을 머물며 오리를 관찰했다.
인근 도로에는 굴착기와 덤프트럭 등 각종 중장비가 마을로 들어왔다. 아직 짓다가 만 아파트를 올리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 아래로는 무분별한 개발 중단하라, 라는 현수막이 펄럭였다.
매서운 바람에 흙먼지가 흩날렸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출퇴근하고 있었다. 모두 살아남으려는 조치다.
생명은 살아가는 목숨이다. 목숨은 숨을 쉬며 살아가는 힘이다. 힘은 생명이 움직일 능력이다. 능력은 감당하는 힘이다. 그러니 생명은 능력 만큼만 힘내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전부 순환의 굴레로 먼저 들어갔다. 살아있는 자들은 그 생명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한다.
애쓰지 않아도 될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불태우는 생명의 발 아래 쌓아 올린 허상의 마천루가 태양을 뒤덮었다. 이 마을은, 도시는 또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로 벌레들을 들끓게 할 것이다.
겨울바람이 노아의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바람에선 삶은 담배 향과 쇠 비린내가 뒤엉켜 신경을 자극했다. 그러나 노아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도 무너지고 있는 터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 담고 싶었다. 이제 자기가 아니면 이 풍경을 기억할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
‘그러나 기록하는 자가 무너지는 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늘 그랬다. 사회는 시대의 흐름과 대세를 핑계로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그 위로 올라간 탑이 안전할 리 없다. 세상이 무너진다면, 가장 먼저 휴지조각이 될 부의 꿈이여.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런게...
“욕심을 너무 부렸다.”
노아는 울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명확하게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가슴 한편이 텅 비어버린 듯한 먹먹함이 밀려왔다. 새롭게 변할 것들을 확인하는 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돌아가자.’
하지만 어디로? 집이나, 방 같은 보편적인 정서가 떠오르지 않았다. 길을 잃었다. 아니, 잃은 게 아니라 버렸다. 기억 속에서 의도적으로. 마치 돌아갈 방이 나를 기다리는 게 두려운 사람처럼. 이대로 나아가면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고 영영 이별할 것만 같았다. 왜 그런가에 대하여 나름의 사고로 문답해 보자면, 감정이 먼저 치고 들어온다. 어떤 이에게는 짧은 시간도 노아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판단력을 잃은 이의 목소리를 누가 들어줄까? 누가...
인근 하천에 꺼억, 꺼억,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였다. 백로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른 외다리 새였다. 새는 눈이 녹은 진흙 구덩이에서 펄럭거리다가 숨을 깊게 몰아쉬기를 반복했다. 새의 털에는 진흙이 엉겨 붙어 윤기가 하나도 없었고, 부리도 곧 말라비틀어질 상태였다. 새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자기를 보고 있는 노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티끌 없이 맑은 검은 눈동자가 절반, 다시 호를 그렸다. 그 입가도 묘하게 무언가를 닮았다.
일그러진 마지막을 다 확인하기도 전에 그 위로 흙더미가 우수수 쏟아졌다. 다시는 깨우치지 말라며 충고라도 하듯, 타인의 욕망이 채워졌다. 할 일을 마친 덤프트럭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떠났다. 노아는 돌멩이를 들어 뒷바퀴를 맞췄지만, 그것뿐이었다. 분에 찬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이미 썩어버린 혀는 무엇도 대변할 수 없다. 무덤도 만들어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살려고 했지만, 도리어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른 것 처럼 우리는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노아는 쉽게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도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다. 주변을 맴돌기도 했고, 눈에 담으며 시간을 죽였으며, 떠나는 것들을 흘려보냈다. 이름이 있지만 없는 듯 여기는 사회를 때론 펜으로 경멸 때론 술로 조롱했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 밀려올 때면 어둠 속을 걷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무엇보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싶어 했다. 함께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믿으며 살고 싶어 했다. 그들의 명예를 어둠으로 밀어넣은 건 다름 아닌 같은 사람이다. 차라리 사람이 아니길 바랐지만, 사람이었다. 산을 밀고 땅을 갈아 건물을 증축시키고, 아파트를 올리는 것도 사람이고, 그 밑에서 하청을 하는 것도 사람이며, 그들에게 상처받으며 포기하지 않고 항쟁하는 이들도 사람이다.
분투하는 이들은 뙤약별이 내리죄면 내리쬐는 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꿀이 보이지 않는 길을 꽃밭으로 가꾸고 다시 노래하고 춤출 날을 꿈꾸었다. 해가 중천인데, 기운이 아직 차다. 노아는 바람이 부는 길에 몸을 맡겼다. 정처 없이 흘러가다 보니 인근 갈대밭 근처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그 옆을 트럭이 지나갔다. 트럭의 라디오에선 신도시 아파트 청약 경쟁률 150대 1기록 개발 성공 사례로 주목, 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바람이 전하는 소식이 종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가슴을 두드릴 때쯤, 누런 상복을 입은 다수의 존재가 상여를 들고 천천히 걸어가는 게 보였다. 상여를 맨 그것은 사람인가, 아닌가? 호기심이 생겼지만, 차마 입을 떼진 못했다. 관에서는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때,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전엔 이런 비가 오면 호랑이는 장가를 가고 여우는 시집을 간다고 했는데, 산이나 숲 대신 골프장만 있는 곳엔 호랑이도 여우도 살아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참새도 벌도 보이지 않는 요즘 시대에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 아닌 사람의 탈을 쓴 무언가가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상여가 노아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저 멀리서 무언가 날아들었다. 아까의 외다리 새였다. 진흙을 털어내지 못한 새가 상여의 보개 중앙에 내려앉아, 몇 번 울어재끼더니 봉황 장식처럼 굳었다.
비로 인해 기온이 더 떨어졌는지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상여는 안개 너머로 계속 이동했다.
‘그래도 관에 누울 수 있는 자는 돌아갈 곳이 있는 거겠지.’
떠날 자가 빨리 떠야 살아남은 자가 살아갈 수 있다. 순환의 거부는 모두에게 고통만 안겨준다. 그렇기에 사람의 삶은 고생의 쳇바퀴를 서로서로 굴리게 된다.
‘물론 산 자는 늘 욕심을 의지로 바꾸기 때문에 그게 마음대로 쉽게 되는 건 아니지만...’
노아는 흙 속에서 꿈틀거리며 나온 지렁이, 축축해진 풀잎에서 기지개를 켜는 달팽이, 한바탕 물난리에 흩날리는 개미들의 헤엄, 이슬 맺힌 거미줄의 거미를 보았다. 살고자 한다. 하지만 그건 의지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본능은 동족을 이유 없이 해치는 게 아니다. 즐거운 것도 아니다. 웃을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저들은 뭐가 그리 즐거워 웃고 있는 결 까?’
노아는 마을 입구 어귀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며 낄낄거리는 검은 덩치들을 보고 혐오감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생각으로만 떠드는 자신이었다.
‘아, 신이시여, 어째서 당신은 내게 날개를 주지 않으셨나이까?’
아무리 원망해도 답신 받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본능이든, 욕망이든, 의지든, 모두 생명의 고유 권한이다. 생명이 있는 한 성경과 십자가는 구원이 될 수 없다. 약해진 마음을 파고드는 요물이 뿌리내린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은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는다.
불안감 , 불안정, 불만족 등. 태어날 때부터 본디 지닌 근본을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것은 착취로 이어지고, 명줄을 부지하며 안심한다. 반면에 깨달은 자들은 저항한다. 살기 위해 저항하며, 생존을 건 투쟁을 한다. 보라, 지금 노아 앞엔 두 개의 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싸우는 자들에 합류하는 영원한 반항의 길, 또 하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안식의 길이다. 누군가를 위한 선택이 아닌 오롯이 홀로 책임지고자 했던 건 어느 쪽인가?
‘행복이 저문 이후,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으로 괴로워할 나날을 위해 사는 것이 한낱 인간의 육신으로 가당한지를 보아라. 아름다울 때 가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상처로 시체 아닌 숨만 붙들고 있는 자들은 어떠한가? 그것은 누구의 욕심인가? 살아있는 자들의 이기심 아니던가? 사람이란 으레 그렇다. 자기가 편하면 그게 시체라도 기생하려 든다. 그러나, 그게 잘못된건가? 어차피 타인의 삶이고, 타인의 평가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주저하지 말고, 할 일을 해야 한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세상엔 선택할 수 없는 이들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회가 있다면 뭐든 하려 한다. 설령 그것이 목숨이 걸렸다고 해도.’
노아는 계속 고민했다.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게 신중함이냐면... 조금다르다.
‘약자는 한 명이라도 절실하다. 사람의 비겁함은 타인의 간절함을 모른척하는 데서 비롯된다. 모두 그렇게 조금씩 외면하고 괴로워하며 산다. 그것이 인간이 쌓아온 사회다. 사람이 서로가 내민 손을 잡지 않으면, 그래서 고립되면 이익은 일부가 독점하고,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는다면, 느릴지언정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지금껏 역사가 증명해 왔다.’
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티끌 없이 하얗고 무던한,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흔하디 흔한 지식인의 손을 말이다. 그리고 눈을 찌푸리며 손을 꼭쥐었다. 감추는 건 부끄러움의 결과인가, 어리석음의 결과인가? 정보의 바다가 아닌 내면을 이끄는 소리는 과연 어디인가?
노아가 아직 행동에 나서지 않은 그때였다. 퍽! 하는 낮고 둔탁한 소리가 크게 한 번, 이어서 두 번, 다시 여러 번 울렸다. 비명의 향연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수라장에 고통받는 자, 웃고있는 자, 외면하는 자가 있다. 저 멀리서 까마귀가 한두 마리씩 모이더니 전봇대에 떼를 지어 앉았다. 까마귀들은 자기들끼리 쑥덕댔다. 이윽고 날아든 무언가가 노아의 머리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살짝 움켜쥐었다. 그는 힐끗 올려다봤다. 처음엔 까마귀인 알았는데, 실제 마주한 크기는 그것보다 2~3배는 더 컸다.
「 여전히 보기만 했는가? 」
놈이다. 외다리 새...
“떠난 놈이 무슨 미련이 있어 다시 온 것이냐?”
노아가 신경질부리며 머리를 흔들고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새는 잠시 날개를 퍼덕일 뿐 다시 그의 머리에 앉았다.
「 어리석은 놈. 」
새는 호기롭게 미소지었다. 살짝 휘어진 그 눈가에 노아가 비쳤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눈가엔 분노가 가득했다.
「 그러나 그뿐이구나. 너 같은 존재는 늘 말로만 세상을 바꾸려 하지. 의지가 없다는 건 숨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 받아들여라. 」
목소리가 노아의 머리에 울렸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노아는 앞도 보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뒤에서 놈의 비웃음이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한때는 불꽃처럼 또 한때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있는 숲과 산이 되고 싶었던 어린 나날이 침몰하는 광경을 두고 또 도망쳤다.
「 지식에 용기가 산화된 자여. 날기를 포기한 자 에게 신은 날개를 주지 않는다. 」
노아는 발을 헛디며 진흙 바닥을 구르다가 눈의 흔적이 아직 남은 구덩이에 빠졌다. 축축한 공기와 고약한 냄새가 코를 질렀다. 시큼함과 동시에 하수구 물비린내가 올라왔고, 간장에 졸여져 눌어붙은 알이 썩어들어가는 향이 깊게 배어들었다. 노아는 헛구역질했다. 눈이 맵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이 본능적으로 버둥거렸다. 필사의 저항으로 뻗은 손이 허공을 갈랐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찰나, 끈적하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그것이 구원이길 바랐다. 그러나 딱딱하고 둥근 구체에 엉켜있는 실이 손에 잡혔다.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드니 뻥 뚫린 두 개의 둥근 구덩이와 그 안에서 서식하는 작고 하얀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잡으려던 삶의 온기는 누군가의 육신임을. 온몸의 피가 식을 만큼 깊은 절망과 공포에 노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괴성이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다.
「 꿈만 좋으며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존재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
잠에서 깬 노아는 어쩐지 방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바뀐 것은 전무했지만 이상하리 만큼 기분이 안 좋았다. 처음엔 피로가 풀리지 않은 탓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감정의 요동을 멈추지 못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생각하는 말을 잃었다. 그는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보았다. 딱딱한 바닥에 얇은 요, 약간 삭은 배게, 열은 황토색 이불, 그리고 펜과 종이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갑자기 두통과 현기증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머리에선 벌레가 사각사각 신경을 긁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던 노아는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