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퍽질퍽 독자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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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이 느릿하게 나를 비웠다.
너를 잃었을 때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적당히 사랑해라. 지겹도록 듣는 말이었다. 묵직한 사랑에 깔려 죽고 싶지 않다면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해. 헤어질 때 아프니깐. 털어버릴 준비를 꼭 하고 있어야 해. 그러니까, 금방 잊어야 한다고.
무언가 텅 비어버린 기분에 사로잡혀 멍을 때렸다. 외로움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사무치게 밀려오는 외로움이나 공허는 이미 익숙했기에. 바삐 움직여 낯선 기분을 떨치려 해도 진득하게 나에게 따라붙었다. 이런 진득함을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불행이 이미 그런 존재였으니까.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었다고 표현한다. 기억을 잃고, 잔향을 잃고 어찌 감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냐 물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딘가에서 들은 적 있는 말이다. 인간은 남겨진 것들로 살아가기에 기억이 유산이자 증명이고 또 존재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잔향 삭제
남겨진 건 꼬깃꼬깃 구겨진 쪽지 한 장이 전부였다. 적힌 내용도 별 거 없었다. 보고싶어. 나도. 다른 글씨체로 적힌 두 단어가 전부인 종이에 애석하게도 녹슨 철 내음이 적셔 있었다. 필통에 구겨진 채 놓였던 그 종이를 예쁘게 피려다 구겨진 자국 위로 죽 찢어졌다. 초라하게 반으로 갈린 그 종이를 지분거리다 책상 위에 그냥 올렸다. 더 이상 지우면 기억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디엠 내역을 캡쳐한 사진을 찾았다. 상대방에게 온 비행기 표 종이 사진 한장. 그 아래 내가 남긴 답장 한 개. 비행기 표에 적힌 도착지는 민스크 (Мінск) 였다. 왜 이는 벨라루스로 향했을까. 아래 내 답장은 결국 그곳이야? 였다. 이들에게, 나와 이에겐 민스크가 어떤 의미일까. 그 이는 하얀 하트 이모티콘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치지직―
우리는 언제 민스크를 벋어날까.
치지직―
당신은 아는가. 다음생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운명은 다음까지 따라오지 않는다. 혹여나 당신이 운이 좋아 운명이 그대를 따른다 해도 그것은 시한부가 있다는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나는 그것을 몰랐고 그 이는 그것을 알았기에 나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른다. 그 이가 잊혀지기를 택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려면 함께 민스크로 갔어야 했지만 난 기어코 따르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그 도시 이름만 들으면 손이 떨리기 때문에. 결국 그 이는 홀로 민스크로 향했고 나는 그 이를 잊었다. 다시 찾은 운명을 훼손하고 우리는 인연이 아니라는 정당화 아래서 죽음이 아니라 헤어짐을 택한 건.
2029년 12월 30일 겨울.
그 이의 비행기 표에는 똑똑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민스크의 기억을 다시 찾은 건 2027년 우리가 20살이 된 해였다. 이율린 (Ию́лин) 은 그제야 미하일을 알았고 미하일 (Михаил) 은 그제야 이율린을 알았다. 시리던 겨울에 서로를 으스러지게 껴안은 건 사랑한다는 증표와 다를 바 없었다. 이율린은, 그러니까 하지우는.
미하일이자 이은채와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이율린은 기억을 점차 잃었다. 민스크에서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도, 그에게 미하일의 형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의 아버지와 이제는 미하일이 죽은 이유도. 자신이 미하일을 부르던 애칭 *시누크 (щенок) 도,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기 전에 미하일은 떠났다. 자신을 따라 죽었냐는 질문에 대답은 끝내 듣지 못한 채.
그렇게 이율린은 미하일을 잊었고,
하지우는 이은채를 잊었다.
잔향이 사라질 때 하지우는 생각했다.
평행 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나요.
차라리 하지우와 이은채가,
민스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분명.
그 세계에서는 운명이 우리를 따를까요.
*시누크 щенок
러시아어로 '개' 혹은 '강아지'를 지칭하는 단어.
https://curious.quizby.me/ugun…^ 퇴고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