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12시 12분. 10년 전 즈음에 우리가 만났던 그 장소, 그 시간에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 なおき(나오키)씨,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바보.
분명 약속했었다. 아니, 서약했었다. 아아, 작년 겨울이었던가. 사람 하나 없는 시골의 비 오는 버스정류장 앞. 점점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엄마, 학교 다녀올게요!
– ゆずは(유즈하), 오늘은 일찍 들어오도록 해!
나는 엄마의 말도 끝까지 안 들은 채로 입에 막대사탕 하나를 물곤 자전거에 올라탔다. 비록 낡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일한 유품이자 마지막으로 선물해 주셨던 자전거였다.
– 으읏, じてんしゃ(자전거)야, 조금만 더 힘내!
나는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입에 들은 사탕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학교에 도착하기까지 자전거로 7분, 걸어서 15분. 그리고 지금은 학교 종이 치기 3분 전인 8시 27분. 이미 지각 당첨이다.
– 후... 오늘도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 한껏 혼나겠네... 이런, 또 반성문이잖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자전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껴 자전거에서 내려 바퀴를 살펴보자, 조그마한 압정에 자전거가 뚫려 바람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 이런 재수 옴 붙은 날이 다 있나...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자전거를 노려보았다. 그런 나를 또 눈에 담고 있는 한 남학생이 있었다. 바로 なおき(나오키)씨. 나보다 한 학급이나 선배였던 なおき(나오키) 씨를 존칭을 빼고 부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에게 검도 결투를 신청하는 어린 남 아이와 같은 행동이었다. 아주 예의 없고 어리석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なおき(나오키)씨는 3학년 중에서도 아주 인기스타였다. 반듯하게 생긴 외모에 훤칠한 키, 영리한 두뇌에 다정한 성격까지. 아마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전부 なおき(나오키) 씨를 알고 있었을거다. 모른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으니까...
– 엇... なおき(나오키) 선배?!
なおき(나오키) 선배처럼 모범생이 나 같은 지각생에게 절대 말을 걸어줄 리가 없었다. 그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아니, 절대 なおき(나오키) 선배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절대로 없었으니까.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내게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내 자전거 바퀴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의 ゆずは(유즈하) 맞지? 자전거가 고장 났구나. 이를 어쩐다...
눈마저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이 귀족적인 なおき(나오키)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고 있다. 저 잘생긴 얼굴로, 내 자전거를 보고 있다. 그 상황은 내게 터무니없이 심장이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 아, 그게 있죠... 저 자전거가 워낙 고물이라... 쉽게 고장이 잘 나거든요. 이 자전거는 제가 어떻게든 가지고 갈 테니... 선배는 학교에 늦으실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세요?
역시 なおき(나오키) 선배 앞이라서 그런가 하고 싶은 말이 뒤죽박죽 엉켜 이상한 언어논리를 만들어냈다. 아직도 후회되는 일 중에 하나.
– 앗, 나를 걱정했구나. 내 걱정은 마. 학생회장이라 어젯밤에 공부를 해서 조금 늦잠을 잤다고 하면 모든 선생님들이 웃으며 보내주시거든. 그나저나, 저 움직이지도 않는 무거운 자전거를 너 혼자 들고 간다고? 학생회장으로서 도움이 필요한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 학생을 무시할 수 없지. 근처에 내가 아는 고물상이 있어. 거기에 잠깐 수리를 맡기자. 내가 같이 옮겨줄게.
역시 なおき(나오키) 선배... 아직 성인이 아님에도 완성된 저 성품은 더욱 내 심장을 박동시켰다.
– 아, 감사해요, なおき(나오키) 선배. 선배는 정말 이름처럼... 바르고 고우세요.
그러자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피식, 웃더니 자전거 뒷부분을 번쩍 잡아들었다.
– 정말? 고마워, ゆずは(유즈하). 너도 유자 나뭇잎처럼 친절하고 달콤하네.
그때부터였을까. なおき(나오키) 선배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
어쨌거나 결론은 なおき(나오키) 선배 덕분에 (지각은 했지만...) 학교를 갈 수 있었다. なおき(나오키) 선배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 꽤나 혼난 모양이었다.
– 저, 저기, なおき(나오키) 선배! 저 때문에 많이 혼나셨죠... 죄송해요.
그러자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 응? 아니, 전혀. 전혀 아닌데. 너 이상한 생각 하고있구나, ゆずは(유즈하)? 난 널 도와서 기쁜데.
나 때문에 지각했으면서도 날 도와서 기쁘다니. 저건 둘 중에 하나다. 이미지 관리를 위한 순백의 거짓말이거나, 정말 너무 착하거나. 요즘 세상에 후자는 보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난 전자를 믿기로 했다.
선배는 싱긋 웃으며 3학년 층인 2층으로 내려갔고, 나는 조금 걸어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 2학년 7반에 도착했다. 저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 이라는 판넬도 얼마만인지. 학교를 도통 안 오니 학교의 변화를 알리가 없었다.
– 쟤가 오늘 なおき(나오키) 선배랑 같이 지각 등교 했다는 ゆずは(유즈하)야? 뭐야, 보기보다 평범하네?
–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팬클럽까지 있는 걸 알면서도 같이 등교하다니, なおぎか(나오기카, なおき(나오키)의 팬클럽 네임.)가 무섭지도 않은가? 간이 부었네, 저 애.
이게 뭐람. 내 평판이 언제 저렇게 됐지. 고작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함께 등교한 걸로?
– ゆずは(유즈하)! 오늘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같이 등교했다는 사실이 정말이야? 나 なおぎか(나오기카)로서 참을 수 없어!
아, 소개가 늦었네. 얘는 내 하나뿐인 단짝, さき(사키). 그와 동시에, 엄청난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팬. なおぎか(나오기카)의 회장. 도무지 나는 범접할 수 없었던 さき(사키)의 모습이었다.
– 아, 으응. 오늘 오다가 자전거가 고장 났는데,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같이 고물상까지 옮겨주시고 같이 등교했어. なおぎか(나오기카)로서 좀 충격이었으려나. 근데 너도 알지, さき(사키)? 나랑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지금까지 접점도 없던, 완전 남 같은 관계잖아.
그렇게 さき(사키)에게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나에 대해 횡설수설 하고있을 즈음,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 앞은 꽤나 분란해졌다. 바로,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등장으로.
*
복도는 꽤나 어수선했다.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なおぎか(나오기카) 아이들로. 그리고 극 내향형인 나는 그런 시끄러운 자리에 끼기 싫었다. 그래서 계속 さき(사키)와 같이 반에 남아있으려 했는데...
– 꺄악! なおき(나오키) 선배!
さき(사키)마저 뛰쳐나가버리다니. 이런 청천벽력이 없지.
– なおき(나오키) 선배 하나가 뭐 그리 좋다고.
나는 뻘쭘히 주변 눈치를 보다 책상 위에 엎드렸고, 아직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 나오시지 않았는지 더 시끄러워진 복도 소리를 들으며 오지도 않은 잠을 청했다.
– 네?! ゆずは(유즈하)요?!
어디선가 들린 내 이름. 고개를 들어 천천히 앞문을 바라보니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손을 흔들며 날 보고 있었다.
– ゆずは(유즈하)! 아까 자전거 앞 바구니에 조그만 열쇠가 있더라고. 전해주러 왔어!
선배가 직접? 왜? 다른 なおぎか(나오기카)나 なおぎか(나오기카) 회장은 さき(사키)도 있잖아?! 나는 なおぎか(나오기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어정쩡하게 일어나 なおき(나오키) 선배 앞으로 다가갔다.
– 감사해요, なおき(나오키) 선배.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발견해주셔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열쇠를 받아들려던 찰나.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주머니에서 황급히 무언가 쪽지를 꺼내 열쇠와 함께 내 손에 꼭 쥐어줬다. 그리곤 여느때와 다름없이 환히 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 ゆずは(유즈하) 손에 무슨 쪽지가 있는데?! 저거,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몰래 주신 거 아냐?!
눈썰미 좋은 한 なおぎか(나오기카)가 내 손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손은 눈보다 빠르다고. 나는 교복 주머니에 쪽지를 재빨리 넣곤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さき(사키)도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떠나자 볼일이 다 끝났는지 다시 내 앞 자리에 앉았고.
– ゆずは(유즈하) 너, なおき(나오키) 선배랑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던거지!
さき(사키)는 장난스럽게 내게 묻는 듯 했다. 하지만 さき(사키)의 성격으로는, 말은 장난스럽게 얘기하지만 그 속뜻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와 비슷한 어조였다.
– 정말 아니야. 내가 어떻게 한 번 접점도 없던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나와 그렇고 그런 관계겠어. さき(사키) 너도 1학년부터 나랑 같이 지내서 알잖아?
さき(사키)는 나와 1학년부터 내내 붙어다녔기 때문에, 내가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혹시 연애라도 한다면 심지어 なおぎか(나오기카)이기까지 한 さき(사키)가 모를리가 없었다. さき(사키)는 그제야 고갤 끄덕이며 인정한다는 눈빛을 보였다.
– 하여간, 그렇긴 하지. 감히 なおぎか(나오기카) 회장인 내 앞에서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정말...
さき(사키)는 전부터 망상을 줄곤 잘했다. 그러니 그런 망상에 쓸데없이 진지한 さき(사키)가 내겐 이해되지 않을 터. 하지만 뭐... 그래도 단짝인데 달래줘야하지 않겠나.
– 에이, さき(사키)! 전혀 안 그래도 돼. 나 어차피 なおき(나오키) 선배 같은 타입은 내 스타일 아니니까...
거짓말이었다.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사실... 조금 시끄러운 것들(なおぎか(나오기카))를 달고 다니긴 하셔도, 얼굴 만큼은 끝내주게 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거짓말하지 않으면 さき(사키)가 더욱 망상의 나래를 펼칠텐데. 나는 さき(사키)의 그런 망상을 듣는 것은 아주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에 나타나신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에 따라 さき(사키)는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을 따라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 나는 교복 주머니를 뒤져 아까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주셨던 쪽지를 펴 보았다.
– 아니, 이거... 데이트 신청이잖아...?
*
– ' 안녕, ゆずは(유즈하)! 이쪽은 なおき(나오키)야. 오늘 방과후에 같이 고물상에 들러서 자전거도 받아야 하고, ゆずは(유즈하)와 같이 저녁도 먹고싶어. 혹시 괜찮다면, 같이 데이트 하지 않을래? (ps. 내가 사는 저녁이야:>) '
아니, 이건 정말 꿈인가. 꿈일거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리 위험하고도 아찔한 일이 내게 벌어질리가.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텐동을 좋아했고, 그 텐동 가게는 학원가가 아주 많은 번화가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면, 수많은 なおぎか(나오기카)들이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나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책가방에서 전에 학교에서 나눠줬던 안내장을 꺼내 한 구석을 찢어 펜을 들곤 무언갈 적기 시작했다.
– ' 존경하는 なおき(나오키) 선배, 이쪽은 ゆずは(유즈하)예요. 정말 죄송하지만, 학교 끝나고부터 바로 학원이 있는 바람에 저녁식사는 어려울 것 같아요. 대신 さき(사키)라는 제 친구를 소개시켜 드릴테니 さき(사키)와 함께 드시는 것은 어떠세요? 정말 좋은 아이거든요. 저와는 나중에 시간이 맞을 때 같이 드셔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만. '
그렇게 모든 글들을 적고 처음부터 읽으며 열심히 검토하고 있던 그때,
– ゆずは(유즈하)? 뭘 그리 열심히 적는거야?
さき(사키)였다.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과 이야기를 끝내고 온 모양. 나는 내 쪽지들을 슬며시 팔로 가려 さき(사키)를 맞았다. 다행히도 さき(사키)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새였다.
– 응? 아니야. 그냥 Today List(일과 목록) 같은 느낌? 근데, 아까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 불려갔잖아.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선 뭐라셔? なおぎか(나오기카)에 대해서 얘기하셨어?
さき(사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 말도 마, ゆずは(유즈하)!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서 なおぎか(나오기카)를 공식 동아리로 만드실 계획이시래! 정말 미쳤어. 이제 어디가서 비공식 팬클럽이라는 말을 그만 들을 수 있어!
なおぎか(나오기카)의 공식 동아리 전향이라... さき(사키)가 생각치도 못한 주제를 들고오자 나도 조금 당황했었나 보다. さき(사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なおき(나오키) 선배에게 썼던 내 쪽지, 그리고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주셨던 쪽지를 그대로 교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으니.
– 그 악독한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서? 도대체 왜? なおき(나오키) 선배를 많이 총애하셨나.
さき(사키)는 방긋 웃었다.
–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도, なおぎか(나오기카)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비공식으론 감당하기 어려울 상태가 되니까 그런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경사야, 경사. 당장 우리 なおぎか(나오기카) 단체 라인(Line, 일본 메신저 앱)방에 공지로 올려야겠어! 우리 なおぎか(나오기카)가 공식이 된다고!
하지만 영 이상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수행평가 전체를 0점으로 주는 그 악덕 선생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 なおぎか(나오기카)를 공식 동아리로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고? 그것도 먼저?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권력에 세게 들어갔을 것만 같은...
– 아, 정말? 좋겠다. なおき(나오키) 선배도 좋아하시겠네.
영혼 없는 대답 같다고? 난 지금 되게 부러운 눈빛을 하며 최대한 놀란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앗, 물론 さき(사키)도 여러분과 같은 느낌을 받은 것 같지만.
– ゆずは(유즈하), 역시 영혼 없는 대답. 그래도 고마워! 그리고, 나 오늘은 꽤나 바쁠거야. 공식 동아리 준비 때문에... 미안해, ゆずは(유즈하)!
さき(사키)는 기도하듯 손을 앞으로 모아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공식 동아리 전향은 바쁠 것이 분명한데. 나조차도 さき(사키)가 먼저 바쁠 것이라 얘기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 아니야, さき(사키). 하루 정도는 혼자 밥 먹을 수 있어. 동아리 준비 잘 하고, 나중에 보자.
さき(사키)는 나를 꼭 안곤 손을 흔들며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정말 나 혼자 남은거지.
*
쉬는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쪽지와, なおぎか(나오기카)의 공식 전향까지. 하루동안 일어나도 다사다난했다고 생각할 일들이 전부 15분 안에 일어났다. 쉬는 시간이 이리도 짧았나, 싶을 만큼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아, 수업 시작했다, 일어나!
종소리도 못 들었는데, 이런, 첫 수업부터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라니. 수학 망할.
– ゆずは(유즈하), 언제까지 엎어져 있을래? 너도 수행평가 0점 받고싶냐!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은 나는 얼른 책상 서랍에서 수학 교과서를 찾아 들었다.
– 자, 다들 칠판 봅시다. 우리 진도를 수열까지 나갔던가? 아니, 아니면 행렬 마지막 진도?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 진도를 확인하는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나는 내가 바깥 창문에 가까운 자리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넓고도 새파란 하늘, 바로 아래 운동장에선 학생들이 체육 활동을 하고 있었다.
– ... ?!
아니, 자세히 보니 なおき(나오키) 선배네 반이었다. 3학년 2반. 그리고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이미 수업 시작 전에 한바탕 뛰었는데 땀 범벅이 된 머리칼과 이마, 빨간 체육복, 노란 형광색 축구화가 조화를 이뤘다. なおき(나오키) 선배, 퍼스널 컬러가 체육시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우리 반 층이 운동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3층이라 다행이었다.
– 잘생겼다...
귀가 정말 밝은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에게도 안 들릴 정도로, 정말 작게 말했다. 안 말하면 죽을 것 같았다. 그 만큼 잘생겼었다.
– 거기, ゆずは(유즈하)! 자꾸 어딜 보는거냐. 창 밖 보지 말고, 칠판이나 좀 봐라.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 쓸데없이 시력은 좋으시다니까. 나는 그제야 자리를 고쳐잡... 기는 커녕 곁눈질로는 계속 なおき(나오키) 선배를 보고 있었다. 내 자리는 なおき(나오키) 선배를 보기에 너무나 명당이었다. 저 발개진 두 뺨이 마치 내 심장 같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 선배가 나를 보지 못하더라도 한 번만 인사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곧 현실로 바뀌었다.
나는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 칠판에 필기를 하시느라 보지 못하는 틈을 타 몰래 なおき(나오키) 선배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보지 못했을거다. なおき(나오키) 선배 시선에서는 내가 점만해 보였을거니까.
– ...!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활짝 웃고 있었다. 나에게 두 팔을 벌려 손을 흔들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두 동공이 마구 흔들리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곤 혹시 다른 이에게 인사한 것이 아닐까, 싶어 주위를 훑어보기까지 했다. 이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마저도 なおぎか(나오기카)가 된건가. 씁쓸하면서도 기분 좋은 이 감정은 뭘까.
– ゆずは(유즈하)! 자꾸 창 밖만 바리보는구나. 나와서 67번 문제 한 번 풀어봐라.
망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 내는 내가 가장 못하는 수학 문제라니. なおき(나오키) 선배 좀 그만 바라볼 걸. 아예 고개를 돌리기보다 곁눈질로만 훑을 걸.
– 네, 죄송합니다...
나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의 따끔한 시선을 받으며 칠판 앞으로 다가갔다. 이 문제는, 내가 조금도 못했던 행렬. 한숨이 깊게 나올 뻔 했던 것을 겨우 참았다.
– 설마, 아까 그리 딴짓을 해놓고 행렬 문제 하나 못 푸는 것은 아니지, ゆずは(유즈하)?
네, 못 풉니다. 못 푼다고요, 이 망할 악덕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아.
– ... 죄송합니다.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은 혀를 쯧쯧 차며 반 전체에 울리게 크게 외쳤다.
– みあわせ ゆずは(미아와세 유즈하), 수행평가 2점 감점.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라.
그래, 나는 이럴 줄 알았다. 이게 전부 쓸데없이 빛나는 なおき(나오키) 선배 때문이다. 전부. 왜 나한테 인사해서는, 왜 지금이 하필 3학년 2반 체육 수업이어서는...
– 들어가라, みあわせ ゆずは(미아와세 유즈하).
그제야 나는 자리로 돌아가 앉을 수 있었다. 반 아이들 앞에서 그런 망신을 당하고, さき(사키)에게 동정의 눈초리를 받아도 괜찮았다. 나는 나만 봤던, なおぎか(나오기카) 애들도 보지 못했던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모습을 봤으니까. 아무렴 괜찮았다.
*
수업은 빨리 지나갔고, 나는 아까 말했던대로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과 함께 교무실로 갔다. 아, 말이 '갔다' 이지, 사실 거의 죄수 마냥 끌려갔다.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은 딱히 별말은 안하셨다. 수업에 집중하라는 뻔한 말만 하고는 되돌려 보냈으니까.
– 12분...
시계를 보니 아직도 쉬는 시간이 12분이나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더 대화가 빨리 끝났던 모양이었다.
– 그래, 거기로 가자.
내가 항상 스트레스를 받거나, 생각할 일이 많을때면 가는 곳이 있다. 바로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 옥상.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 옥상은 미화 선생님들이 항상 꽃이나 조그마한 나무를 심어두어 단 하루라도 파릇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그 꽃과 나무들에게 이름마저 지어줄 만큼 애정이 깊었다.
– さつき(사츠키), 잘 지냈어?
さつき(사츠키)는 5월이라는 뜻이다. 작년 이맘때쯤 옥상에 처음 올라와 さつき(사츠키)를 만났으니 그렇게 단순히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 매번 올라오지 못해 미안해. 그렇지만 さつき(사츠키), 여전히 예쁘네.
さつき(사츠키)는 장미였다. 외관은 예쁘고, 아름답지만 장미의 내면적인 그 가시는 마치 나와 비교되어 보였다. 사람들에게 누구나 호감 있게 다가가지만, 막상 조금 친해지기라도 하면 바로 내 안의 가시가 들통나버릴 것 같은. 그래서 더욱 さつき(사츠키)에게 정이 갔다.
나는 슬쩍 일어나 한 조그마한 나무에게로 향했다. 이 나무의 이름은 すず(스즈). 사실 무슨 종류의 나무인지도 모르지만, 나의 さき(사키)와 さつき(사츠키) 다음으로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 すず(스즈), 너도 오랜만이네. 아직도 잎이 파릇해. 예쁘다.
그렇게 나는 すず(스즈)의 잎사귀를 조금씩 만지며 이를테면 교감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끼익— 하고 열리는 옥상 문과 함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등장한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보였다.
– 어라? ゆずは(유즈하)?
나는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옥상 밖으로 나가려 했다.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같이 있으면 심장 어딘가가 망가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잠깐만, ゆずは(유즈하)! 내가 아까 건네준 쪽지, 읽었어?
완전 잊고 있었다.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쪽지... 있는 줄도 까먹고 있었다. 나는 내 교복 왼 주머니를 뒤져 쪽지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なおき(나오키) 선배 것, 하나는 내 것.
– 아, 죄송해요. 깜빡 잊고 있었어요... 아침에 자전거 일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녁식사는 무리일 것 같아요. 끝나고 학원이 바로 있어서... 차라리 さき(사키)라는 제 친구는 어떠세요? なおぎか(나오기카)의 회장인데...
さき(사키)라는 이름이 나오자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 너 학원 아무것도 안 다니는 사실은 이미 알거든. 그러니 그냥 거절해줘도 돼. 그리고 さき(사키)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여서. なおぎか(나오기카)도 그렇고.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에, 팬덤까지 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점점 의문이 되었다.
– 거짓말은 죄송해요... 하지만 なおぎか(나오기카) 애들이 저와 선배가 같이 있다는 것을 알면 노발대발 할 거에요 분명...
그러자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그런 이유라면 들키지 않으면 되잖아?
나는 순간 벙쪄 멍하니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 ゆずは(유즈하) 너, 내가 번화가의 텐동 가게를 갈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텐동 말고, 같이 라멘이나 먹을까? 저기 버스정류장 옆 변두리에서. 그러면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거야.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내가 뭐라고 이렇게 나와 저녁을 먹고 싶어 하실까. 내가 뭐라고? 고작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의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 에 속한 흔한 한 학생인데.
–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저를 왜 이렇게 챙겨주세요? 꼭 제가 아니어도,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친구도, 지인도 많으시니까 같이 먹을 사람은 많잖아요.
선배는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 ゆずは(유즈하) 너, 기억 안 나는구나? 하긴, 꽤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까...
– 네? 무슨...
아, 이놈의 학교.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종이 울리다니. 망할 いあわせ(이아와세) 고교.
– 앗, 종 쳤다! 나 먼저 가볼테니까, 다음 쉬는 시간에도 옥상에서 만나! 잘 가, ゆずは(유즈하)!
정말 이런 망할 なおき(나오키). 왜 이렇게 쓸데없이 다정한거야.
*
다음 쉬는 시간. 나는 누구보다 빨리 옥상으로 뛰쳐 올라가 난간에 기대 なおき(나오키) 선배를 기다렸다. 마치 이전에 나를 봤다는 듯이, 그렇게 얘기를 하면 누가 안 궁금해?
– ゆずは(유즈하), 먼저 와 있었네? 완전 빠르다. 나도 뛰어왔는데.
나는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
– なおき(나오키) 선배, 저 이전에 어디서 보신 적 있으세요?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요리조리 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 너 중학교 1학년 때... 나 본 적 없어? 기억 동아리.
아, 기억 동아리. 맞다, 잊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에 했던 그 동아리였다. 사실 겉으로는 기억들에 대해 분석하고, 열띈 토론을 벌일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그냥 서로 추억팔이 하면서 수다나 떠는 동아리였기 때문이다.
–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기억 동아리를 어떻게... 아세요?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기억 동아리에 없었다. 없었음이 분명했다. 동아리에서 なおき(나오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いらがな なおき(이라가나 나오키). 그는 중학교 시절 나와 꽤 친하게 지냈던 선배였다. 어딜가나 인기 많은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내 친구라니. 중학교땐 한껏 기가 살아서는 なおき(나오키) 선배만 믿고 의기양양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1학년 9반(당시 중학교의 내가 1학년 9반 학급우였다.) 까지 기꺼이 찾아와 내게 말했다. 자신의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자기가 정말 멋있는 동아리를 만들었노라고.
– 정말요? 무슨 동아린데요? 텐동 동아리?
맞아,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그때도 텐동을 좋아하셨지. 깜빡 잊고 살았다.
– 푸핫, 뭐? 텐동 동아리라니. 그런 거 아니고, 기억 동아리라고. 그냥... 동아리 부원들끼리 추억도 쌓고, 추억도 떠올리며 잡담하는 동아리야. 들어오지 않을래?
추억하는 동아리라면 추억 동아리지, 왜 기억 동아리일까.
– 아니, なおき(나오키) 선배! 그럼 왜 기억 동아리예요? 기억하는 동아리 활동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조금 웃더니 말했다.
– 추억 동아리라고 이름 지으면, 나중에 이 기억을 추억만 하잖아. 그럼 슬퍼지고. 나는 차라리 이 동아리 활동을 영원히 기억해 마음 속에 품고 살고 싶다는 의미로 기억 동아리라고 지은거야.
역시 なおき(나오키) 선배. 이름 하나도 허투로 짓는 법이 없는 꼼꼼한 남자였다.
– 기억 동아리라... 네! 좋아요. 저 가입할래요.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 뭉치 중 종이 한 장을 건넸다.
– 이거, 가입 신청서인데... 사실 너는 이미 합격이지만 신청서를 받는 것이 원칙이래서. 대충 적어도 돼. 기본 정보만.
그래서 なおき(나오키) 선배에게 받아든 그 종이를 쉬는 시간이 지나가라 헤실헤실 웃으며 적었던 기억이 있다. 그랬었는데...
*
– 아, いらがな なおき(이라가나 나오키)... 이제 알았어요, なおき(나오키) 선배. いずみ ずんはくぎょ(이즈미 중학교) 2학년 3반...
그제야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내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았다.
– 보고싶었어, ゆずは(유즈하). いずみ ずんはくぎょ(이즈미 중학교) 1학년 9반.
종이 울렸다. 분명 들었다. 종이 울렸는데... 어째서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나를 아직도 안고 있는거지.
– 조금만 더, 안될까? ゆずは(유즈하)...
이상했다. 마치,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듯한 행동들이. 전부... 거짓일텐데.
– なおき(나오키) 선배, 이러시면 제가 오해해요.
오해한다는 말로 なおき(나오키) 선배를 품에서 떼놓을 예정이었다. 보통 그러면 몸을 떼곤 하니까. 하지만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 어떤 오해?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아직 품에서 나오지도 않은 상태로, 그대로 내 어깨에 고갤 숙여 파묻곤 얘기했다. 난 너무 당황한 나머지,
– 당연하죠. 선배, なおぎか(나오기카) 애들은 어쩌고요? なおぎか(나오기카)가 이렇게 다른 여자 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걸 알면 학교가 뒤집어질 걸요?
선배는 그제서야 고갤 들어 내 눈을 마주쳤다.
– 내가 널 좋아한다고 네가 오해한다고 했던 거, 그거 오해 아니야. 그리고 나는 팬클럽이 생기길 바라지도 않았어. なおぎか(나오기카) 애들... 어딘가 음침하고 불편해. 나는 네가 좋아, ゆずは(유즈하).
다른 말은 전부 필요 없었다. 단지 그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_ 네가 좋아, ゆずは(유즈하). _
ほぃっす 2
なおき(나오키) 선배의 고백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하교 시간은 금방 다가왔다. 그리고 책가방을 메곤 2はくにょん 7ばん(2학년 7반) 을 나서려는 순간,
– ゆずは(유즈하)! 오늘 같이 저녁, 안 잊었지?
아까 분명 거절을 한 것 같은데, 어째서 같이 밥을 먹기로 했었더라.
*
– 이모! 여기 돈코츠, 소유 하나씩이요!
결국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같이 변두리 라멘 가게에 왔다. 그와 동시에, 조금 진지한 이야기도 하기로 했고. 멍저 침묵을 깬 건 나였다.
– 뭐? なおぎか(나오기카)가 공식 동아리로 전향...? 미친거야? 설마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아니지? 하긴,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 그럴리가 없지.
나는 조금 머뭇거리곤 말했다.
– さき(사키)라는... なおぎか(나오기카) 회장인 제 친구가 오늘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께서 먼저 건의하셨다고 하던데... 그거 선배 도움 아니었어요?
나와 なおき(나오키) 선배 둘 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あおいた(아오이타) 선생님이 さき(사키)에게 なおぎか(나오기카)의 공식 동아리 전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 난 애초에 なおぎか(나오기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무슨 소리야.
이 なおぎか(나오기카)의 공식 동아리 전향은 조금 더 증거 수집이 필요해 보였다.
– なおぎか(나오기카)는 그렇다 치고... 우리, 그, ... 그거... 해?
' 그거 ' 라니. 혹시, 연애?
– 연애... 말예요?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내가 なおき(나오키) 선배를 좋아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내 단짝이자 なおぎか(나오기카)인 さき(사키)... さき(사키)가 나와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연애하는 것을 알면 정말 절교할지도 모른다. 내 하나뿐인 친구는 さき(사키)인데.
– ... 저는 아직 연애할 준비가...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내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 어렵게 다시 널 만났으니까,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나중에라도, 정말 먼 미래라도 꼭 나와 연애하겠다고 약속해줘. 그게 설령 100년 뒤일지라도.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약속하는 손 모양을 만들며 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서 내가 거절한다면, 다시는 なおき(나오키) 선배와도 만날 일이 없겠지.
– 네, 약속할게요. 아니, 서약할게요. 언젠간 꼭 선배와 연애하겠다고.
우리의 첫 서약. 그것은 단순한 손가락 걸기로 시작되었다.
*
라멘은 생각보다 늦게 나왔고, なおき(나오키) 선배와 나는 가벼운 대화들을 나누며 라멘을 먹었다.
– 벌써 7시 반이네요. 선배는 집에 일찍 안 들어가셔도 괜찮으세요?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싱긋 웃었다.
– 겨우 7시 30분인데, 뭘. 한참 늦어도 괜찮아. 나, 자취하거든.
なおき(나오키) 선배가 자취를 했다고—?! 언제부터?
– 자취요? 멋있으시네요. 저는 아직도 부모님과 사는데.
なおき(나오키) 선배는 도대체 못하는 일이 뭘까.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날 좋아하다니. 이건 영원히 깨지 않는 꿈, 과 비슷한 걸까.
– 아, 부모님이랑 사는 게 당연한거지. 귀엽—
선배의 말을 뚫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온 몸이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