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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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6 20:29조회 62댓글 2필견
https://curious.quizby.me/zeoz…

그것은 여름에 피어난 갈증이었다. 갈증은 비릿한 섯내가 바람을 타고 내 마음에 피어났다. 그래서 자비 없는 이 독한 계절이 싫었다.

“오늘도 지독하군.”

구름 한 점 없는 평온함 뒤로 끈적한 습기를 머금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내 인내를 방해한다. 사슴이었다면 사냥감으로 판단하여 사냥하면 그만이지만, 나에겐 그 이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해가 길면 길수록 인내는 바닥을 보인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 사람과 애초에 사람이 아닌 것들이 마구 섞여 다니고 있다. 나는 그 경계에서 살게된 지 벌써 20년이나 됐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익숙해지겠지만, 어쩐지 난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더 알맞다.

언젠가 어머니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비록 어쩌다가 이런 존재가 되었다 해도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해선 안 된다고.

그래서 송곳니를 갈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 십자가에 기도하며, 술하게 참회했다. 죄가 있다면 죽은 후에 갚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젠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자신을 제어해야 한다.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날 붙잡아두기 위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유는 쇠사슬만큼 많을수록 좋다. 그건 날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머무르게 해준다.

어쨌거나 그래서 결론은...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무더위가 깔린 대낮에 아무도 없는 모래 사장을 뛰었다. 숨이 천천히 차올랐다.

“보아라! 태양아 나는 그때 이후로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의 재간 을 보고 어디 한번 실컷 비추어 보아라. ”

이건 지금까지의 관습을 벗어던지고 싶은 몸부림이지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다. 어디서든 존재하는 사람이 늘 그렇듯 평범하게 조깅하는 것과 다름없었을 테니까.

아무도 날 비웃지 않는다. 아니,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상상하는 바람에 불과하다.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그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빛의 세계를 똑바로 응시한 지 너무 오래되어 버렸다. 그 후 로별이 마지막을 태울 때 가장 빛나는 것처럼 내 하루도 눈감기 전에 가장 크게 깨어있게 됐다.

뛰는 속도를 올렸다. 세상이 빠르게 활개친다. 그렇게 힘들게 몇 바퀴를 돌다 보면 생각이 저절로 비워진다. 피가 빠르게 돌며 심장이 타오를 듯 조여들고, 일정했던 호흡은 거칠게 가빠온다. 다리에 얼마 없는 근육들이 제멋대로 떨린다. 하지만 피부는 땀을 내밸을 줄 모른다. 오히려 새빨갛게 익어 타버릴 것만 같았다.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젠 익숙해져야 한다.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불만은 곧 화로 바뀌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소리 질렀다. 무엇으로부터 발생한 화인지 알고 싶지 않아 소리만 질렀다.

‘슬프지 아니한가. 괴롭지 아니한가.’

정신이 들었을 땐, 내 방 침대 위였다. 다행히 꿈이었나 보다. 누구에게도 설명하기에 부끄러운 꿈. 그건 나의 자의식 과잉이 돌출된 퍼포먼스였다.

어제 우연히 본 영화가 문제였나? 아니면 진짜 계절 때문인가? 알 수 없다. 다행인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건 관객 없는 연습이자, 나만의 일탈이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목마르다.”

꿈 때문일까? 머리가 핑핑 돌고,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물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붉고 진한 것을 원했다. 하지만 어디서 얻는단 말인가? 또 떠돌이 개나 고양이, 아니면 시궁창 쥐 같은 야생동물에게서 필요한 만큼 얻거나, 헌혈의 집에서 홈치거나 하면 될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된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하지만 이 갈증은 사람이 아니고선 채워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피는 나를 사람이 아닌 나로서 존립하게 한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 텐데, 괜찮을 것 같지 않나?’

그래, 내 주제에 사람으로 남긴 무슨 사람으로 남냐. 지금까지 겨우 생을 버틴 주제에 . 그래서 문명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 주제에.

“아... 살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뒤집힌다. 욕망을 이긴다는 것만큼 치열한 싸움도 없다. 그리고 거꾸로 매달린 내가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땐 맛없는 피가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엔 쥐 한 마리가 물려 있었다. 이게 나의 한계다. 정신이 나갈 땐, 이런 모양새로 버틴다.

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도 꿈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고 싶다. 커튼콜을 받고 싶다. 나답게 살고 싶다.

“사람답게 대접받고 싶다.”

하지만 그건 한낱 꿈이겠지. 나조차 자기의 모습을 헷갈리는데, 꿈이 무슨 소용인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것은 정당한가? 그건 사람이 아닌 짐승이 하는 짓인데... 나와 비슷한 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다. 늘 몸을 숨기고 쥐 죽은 듯이 그래서 커뮤니티도 따로 있었다. 물론 그래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모든 이들이 초인이 아닌걸. 살아있는 이상 목숨은 하나인걸. 그리고 내 인내심은 바닥 나 버린걸. 이제 내 모습은 그 어느 하나도 거울에 비치지 않게 됐다.

비명을 내질렸다. 누군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단 하나뿐인 구원을. 그러나 소리는 차가운 반지하에서만 울릴 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윽고 무언가 목을 턱 하니 막더니, 더는 목소리가 크게 나지 않았다. 집에 있는 물건을 있는대로 집어 던지려 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끝인가?’

시야도 줄어갔다.

“죽기 싫어.”

하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명줄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그럼, 딱 한 번만.. 딱 한 번이면 돼. 늘 그랬던 것처럼 밖으로 가자.’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에 흔들리는 순간, 날 얽매고 구속하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그대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도는 것처럼 바닥이 빠르게 지나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높게 뛰어오르니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다.

“Through many dangers, toils and snares, I have already come.”

언젠가 우연히 듣게 된 노래를 뜨문뜨문 부르며 나아갔다. 이때 내 표정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저 목표물을 포착하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돌리고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시선이 머문 반사경에 비친 건 사람이 아닌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시간은 잠깐뿐이었다. 나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머니, 당신과의 약속을 더는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인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 많은 인내로 죽는 그 순간까지 날 사람으로 대하려고 했다. 그 덕에 사람답게 사람과 어울릴 수 있었고, 또한 그 인내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쌓아올린 것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너무 쉽게 사그라들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 절벽에서 미는 것만 같았다. 바람은 시원했다. 땅에 닿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후에 올 고통도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누구세요?”

덜덜 떠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정신이 들었다. 어두운 골목 가로등 아래에 하얀 파자마 차림인 검은 아이가 투명한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이란 가정은 필요 없다. 그렇기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나는 등을 최대한 꼿곳하게 피고, 치아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너.. 내가 보여?”

나의 질문에 검은 아이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두려움에 의한 감정인가? 본능인가? 사실인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내가 보이는구나.”

그리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뭘 물어보는가? 왜 하필 이런 조그마한 아이인가? 역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아이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루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어떻게 보이니?”

염원을 담은 질문이다. 간절히 바랐던 답을 원했다. 호흡이 가빠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검은 아이는 고개를 가웃거리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나의 발이 빛에 닿는 순간,

“어, 어어.”

아이는 급하게 숨을 들이켜고는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약하게 점점 강도를 높이는 동시에 목소리도 커졌다.

“엄마! 엄마!”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동네가 떠나갈 듯 개 짖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지며 날 어지럽게 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내는 아이를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잠깐 조용히 해.”

투두둑 소리가 나더니 아이의 신형이 맥없이 축 늘어졌다. 이상했다.

“그렇게 힘을 강하게 주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치아로 아이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혈기가 채워지며 심장이 끓어올랐다. 아드레날린이 신경을 채우는 동시에 쾌감이 느껴졌다. 또 다른 의미에서 머리가 돌 것만 같았고, 한편으론 취한 것 같았다.

“무엇을 먹었길래 이런 맛이 나는 걸까?”

자유의 맛은 달았다.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어때? 맛있지?”
“응!”
“이것도 먹어보렴.”
“응!”
“이쪽으로 와봐. 더 맛있는 게 많아.”
“응!”

그러나 고해 속 쾌락은 순간의 감정이었다. 햇불이 타오를 것이다. 선을 넘는 순간, 바닥에 처박혔다. 음성변조를 한 것처럼 갈라지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채우며 날 비웃었다. 그리고 생지옥의 문이 열렸다.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우르르 쏟아지는 발걸음이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십자가를 젊어진 그들은 하나같이 날 보았다. 하지만 그건 사람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내 정체는 그렇게 규정됐다.

“저기다!”
“매달자! 매달자! 매달자!”

난 성난 군중을 견디지 못하고 뒷걸음쳤다. 그 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손은 덩굴이 되어 막무가내로 날 옭아매려 했다. 두려웠다. 그들이 날 붙잡으려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사고가 얼룩져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털어놓는 진실은 와해하기 쉽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얻은 기회는 무너졌다. 나를 지탱할 수 있는 건 더는 남지 않게 됐다. 겁에 질린 나는 그 거친 악의를 억지로 비틀고 빈틈을 만들어 급하게 뛰쳐나갔다.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생각해 보니 그건 사람의 아이가 아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지옥의 문을 열 파수꾼이었다. 왜 진즉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간절히 소망할 때 가장 먼저 속삭이며 다가오는 것은 그런 존재임을.

‘아아- 이제야 생각났다. 나 사람을 죽였었지.’

깊게 묻어 두었던 죄책감의 조각 하나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무한한 악몽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그러니까 소통할 존재가 사라지고, 그럼에도 아직 사람이길 바라며, 그런 사실 하나로 안주하던 시절. 그때도 여름이었다. 그리고 장맛비가 내렸다. 나는 교회 대강당 제일 뒤쪽 끝자리에 앉아 목사의 예배에 맞춰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머니, 전 당신이 부럽습니다.’

원죄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던 가장 복되신 구원자를 위한 안식의 기도. 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을 위한 고해성사다. 그래서 나의 바람과 예배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빗소리가 거세질 무렵, 대강당을 울리던 목소리가 사그라들고, 사람들은 떠났다.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가 더는 인식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다.

오후 예배까지 모두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그때, 갑자기 몸에서 경련이 나더니 그대로 교회 의자에 쓰러졌다. 갈증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아무도 없는 교회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장의자 뒤쪽 구석에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나의 기도가 무성의했던 탓일까? 목소리가 작았던 탓일까? 피가 쏠린 것처럼 주변의 사물이 겹겹이 보이더니, 천둥소리와 함께 퓨즈가 끊어지듯 기절했다. 만약, 이때 기절하지만 않았어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다시 눈을 뜨니, 교회 뒤편에 있는 공동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누가 날 이리로 옮긴 것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입에서 피 맛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피가 아니었다.

‘너... 내가 보여?’

그때 까맣게 잊고 있던 속삭임이 들렸다.

‘다행이다. 내가 보이는구나.’

갈라지는 중저음의 목소리.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의 목소리. 날 이렇게 만들고 사라져 버린 연좌의 목소리. 나의 그림자.

‘그래. 내가 어떻게 보이니?’

아버지.

“여기 있었군요.”

악몽의 끝자리에서 겨우 정신을차렸을 때 들려온 것은 난생처음 들어본 목소리였다. 나는 검은 호수가 보이는 눈 쌓인 산꼭대기 거목 아래에 누워있었다. 잿빛 하늘엔 태양이 떠 있고, 주변은 안개로 덮여 있다. 멀리서 서두르는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 밖에 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붉게 물든 내 옷과 피부는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사람이라고 하기엔 조금 특이했지만, 그 어떤 목소리보다 편했다.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난 쪽을 보자 하얀 옷을 입고 십자가 목걸이를 한사람이 날 보고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보여요?”
“당연하죠.”
“어떤 모습으로 보이나요?”
“사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내가 원하는 걸 진짜 다 아는 것처럼 정해진 그대로였다. 두려웠다. 어쩌면 이것은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신데 저를 볼 수 있는 거죠?”
“사람이요. 당신과 같은 사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염원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요?”
“바라고 바란 게 이제야 이뤄지게 된 것은 아닐 까요? 여기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세상에그런 곳도 있나요?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
“간절히 바라면 또 없을 리가 없죠.”

잿빛 하늘이 태양에 녹아들어가며, 주변이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미풍에 풀밭들이 춤을 추었다.

“... 전 죽은 건가요?”
“그게 당신의 바람이었나요?”
“아뇨, 절대로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는 걸 눈치채고 조금 가다듬었다.

“나는... 나는.”
“말하지 않아도 돼요. 알아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는 나를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피부 가까이 느껴지는 체온은 포근했고, 따뜻했다. 나의 기도가 닿아서 천사가 내려온 걸까? 그의 등 뒤에 날개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멀리서 큰 종소리가 총 3번 울렸다.

“그만 가요. 곧 기도 시간이에요.”

그는 나의 손을 놓고 앞서서 나갔다. 나비처럼 떠나가는 그를 따라 나도 동산을 올랐다.
동산은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땀을 흘리기엔 충분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 안심이 되었다. 동산을 넘어가자 드넓고 푸른 언덕 하나가 또 보였고, 그 위로는 하얗고 큰 건물이 보였다. 커다란 종이 그 건물 꼭대기에 달린 것으로 보아 아까 종소리는 저기서 난 것 같았다.

“저기 모두 모여있어요.”

그 사람처럼 하얀 옷을 입은 이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어서 와요!”
“그동안 어디 있었습니까? 형제여.”
“우리와 함께해요!”

그는 나를 그들의 품으로 인도했다. 그들은 나와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고, 내 손을 잡아주기도 했고, 나를 껴안기도 했고, 내 뺨에 키스하기도 했다. 너는 짐승이 아니다, 너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이다, 너는 우리와 같다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 붉게 물든 껍질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나의 옷은 그들과 같이 하얗게 변했다.

환영을 받으며 건물의 거대한 문 앞에 다다르자, 그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틈 사이에서 가장 먼저 비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었다. 환한 빛에 눈이 멀어 쓰러질 것 같았는데, 뒤에서 하얀 옷의 천사들이 나를 부축하며 괜찮다고 응원했다. 천국은 있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곳이 천국이고, 내 걸음 앞에 있는 사람은, 아니, 면류관을 쓴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이었다. 신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존재는 신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그래, 신을 맞이한 것이다.

“기도합시다.”

그는 살포시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두려워 말라.”

그의 날개 달린 눈동자들이 나를 응시했다.

“그대는 내가 보이는가?”
“예”
“어떻게 보이는가?”

어째서 신이 내게 그런 걸 묻는 것일까? 이해하지 못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신이 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꼭 채우고 있었다. 입 밖으로 한마디만 더 꺼내면 이곳을 잃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들어오자마자 내쫓기긴 싫었다.

“아버지.”

하지만 원치 않았던 것과 다르게 내 입에선 애증 어린 목소리가 나왔다. 감정은 때론 나도 모르게 앞서가곤 했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박수소리도 환한 웃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하얀 옷의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검은 천으로 자기 눈을 가렸다.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빛은 꺼 져갔고, 눈동자는 더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새 무리의 날갯짓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려오더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건물을 피해 밖으로 도망친 나는 중심을 잡으며 버둥거렸다.
멀리 언덕에 문 하나가 보였다. 나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때,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오더니 붉게 물든 별 하나가 떨어져 남은 것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문이 부서지고, 내 몸도 불탔다. 비명을 질렸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나의 시신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아이처럼 웅크렸다. 하얀 옷은 검게 사라졌고, 나를 다시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러나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이 꿈이란 사실을.

‘쾌락은 순간이고, 꿈은 짧으며, 현실은 길다. 구원은 누구에게 달렸는가?’

삶이 고된 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환경과 사회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지나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눈을 가린 악몽의 천사들이여, 보편적인 너희들이 우리의 치아와 날개와 밤까지 훔쳐서 자신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는구나. 길이 막힌 우리에게 대체 누가 어떤 권리로 인간다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근처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해는 아직 뜨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와 손바닥과 발등에서 흘러내린 피는 쇠사슬을 타고, 십자가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멀리서 검은 옷을 입은 해방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십자가에 묶인 우리를 해방하는 주술을 걸고 있었다.

꿈을 벗어난 나는 진정한 미소와 웃음과 이해와 사랑으로 채워진 평등한 세상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수평선이 꿈틀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방자들의 검은 날개가 날 덮었다. 그들이 나를 사람으로서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못다 한 인사와 대화는 다른 세상에서 나눕시다.”

내가 이 땅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더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눈에서 흐르는 물이 더는 느껴지지 않자, 마법에 걸린 것처럼 갈증도 멎었다. 호통도 얌전해졌다. 이어지는 암전. 그래, 해방이다. 엄중한 희망을 내려놓으니,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 그저 조금 졸릴 뿐. 나는 괜찮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괜찮다. 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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