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떠나보낸 지 얼마나 되었더라. 지금 와서 곱씹어도 몇 년은 훌쩍 넘는 시간에 그 아픔까지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은 금새 네 빈자리로 채워지고, 내가 끌어안았던 것은 오직 공허함만이었을까. 첫 시작에 네가 보인 순애적인 태도가 아직까지 나의 눈을 흘기게 된다. 그토록 다정했던 너는 이제 사진으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내 곁엔 네 잔해들 뿐이다.
그저 나를 지켜야 했던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들 뿐이었다. 그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아픈 현실이었다. 네가 감당해야 했던 일들은 모두 나의 몫으로 남아 너만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가끔 나를 껴안던 네 체온과 목소리는 나의 귓가를 맴돌며 상상을 깨부순다. 아직도 내 눈엔, 내 귀엔 네 모든 것들이 가득한데. 너를 볼 수 없는 내가 이토록이나 원망스럽다.
* 그대는 어찌 이리 아픔만을 남겨두고 가셨나요.
그와 함께 읽었던 최근의 책은 이별 시집이다. 그가 전쟁터로 나가기 전, 염려 말라 선물해주고 간 그 시집은 나의 자개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 만약 그가 돌아오면, 다시 책을 돌려주며 그대를 너무나 연모한다 속삭였겠지. 전쟁이 끝나갈 무렵, 군이 전한 사실은 지금도 가슴 한 켠이 눈물로 차오른다. 댁네 아재가 돌아가셨다고.
그 이후론 온전히 울었던 것만이 또렷하다. 울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눈물샘이 말라 더이상 나오지 않을 때 즈음 그이에 대한 애도도 끝맺음을 볼 수 있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애절함을 눈물로 달랬던 그간의 시간들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 순아, 아버지 많이 보고 싶나.
가끔 순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순이는 그저 해맑은 얼굴로 자신에게 아버지가 어딨냐 답하지만, 오히려 그걸 묻는 내 얼굴에 비가 내릴 뿐이다. 순이에게 이런 것조차 묻는 내가 싫다. 그저 그이가 가만히 살아 돌아왔음에 안도하는 상황만을 상상 속에서나 꿈꿀 뿐이다.
* 어무니, 지는 엄니 하나만 있음 되어요.
들밭에서 따온 나물을 머리에 인 채 걸어오는 순이를 발견했다. 소쿠리 하나라도 더 좋은 짚대로 엮어주지 못한 것이 한참이나 미안해 죄책감에 시달렸다. 사내나 낳은 주제에 상투 하나 씌워주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나 밉고 멀게만 느껴졌다. 순이는 남들과 확연히 다른 아이였다. 그 중에 하나가 아버지가 없다는 점이었는데, 아마 순이는 그럼에도 싫다는 내색 하나 없이 열심히 냉이를 캐왔다.
* 야, 박순이네 봐라! 만날 냉이나 캐서 제 아미나 갖다준다!
순이와 함께하는 저녁은 항상 냉이 반찬에, 냉이 국들이 전부였다. 제 아비를 닮아 냉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순이가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항상 그이가 생각나 평범한 물에 비린 맛만 느껴졌다. 항상 냉이 반찬 하나 내어주면 밥 한 공기는 뚝딱 해치우던 그이의 모습이 자꾸 순이와 겹쳐 보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순이에게 자연스레 말문을 트게 되었다.
* 순이야, 너는 아버지가 없는 게 아니다.
순이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해주곤 한참 내리 또 순이와 부둥켜 안곤 밤새 눈물을 흘기었다. 순이도 그제야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던 이유를 깨달았는지, 제 아비가 보고 싶은 건지 나보다 더 여린 얼굴을 보였다. 그저 순이의 눈물이 나의 옷소매를 적실 때 즈음, 나는 방 한 쪽 벽에 걸려 있던 그이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 보고 있다면, 내게 작은 선물을 내려줘요. 그대를 잊을 만큼이나.
내가 처음으로 그이에게 빌은 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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