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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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6 20:30•조회 24•댓글 0•여우비
오랜만에 너와 함께 등교를 했다. 네가 사는 아파트 앞 그네에 앉아 너를 기다렸다. 괜히 휴대폰을 두드리며 딴 짓을 했다. 네가 헐레벌떡 아파트 입구로 나왔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짓 했다. 네가 날 발견하고 잰걸음으로 뛰었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눌렀다.

“몸은 괜찮아?”

“응. 좀 늦었네.”

“…….”

“장난이야.”

말하고서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너는 어이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숨을 뱉었다. 같이 웃음을 지었다. 네 눈이 순식간에 휘어졌다.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너에게 붙었다. 그런데 순간 볼 수 있었다. 얼굴을 돌리는 네 표정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하고 고독한 표정이었다. 나는 애써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걷기만 했다. 정적이 앉았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자 너는 바로 너의 자리로 갔다. 나도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했다. 자꾸 네 표정이 아른거렸다. 무언가 일이 있어보였다. 요즘 들어 자꾸만 보이는 네 표정이 거슬렸다.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결국 수업 시간을 흘려 보냈다.

밥도 대충 말아 먹었다. 홍합 미역국이 나왔다. 조개류를 싫어하는 너는 미역국에 입도 대지 않았다. 나는 그런 네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분명 조개를 잘 먹었던 때가 있었는데. 자꾸만 평소와는 다른 네가 눈에 밟혔다. 그러면서도 너와 마주치면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내 감정과 표정을 숨기려고, 일종의 버릇이었다. 친구 사이라고 안 숨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서는 숨기는 게 더 많아지게 된다. 사람과 친해질 때는 대부분 그를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어떠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넌 어떻게 생각할지 가끔 궁금해진다.


*


어찌저찌 일주일을 넘겼다. 28일. 12월의 끝자락에 내려앉아 있었다. 4일만 넘긴다면 우리는 열아홉이 된다. 열아홉이라는 숫자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새로운 두 자릿수를 맞이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버지는 살아계셨을 때 늘 아이들은 빨리 자라니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이제 보니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갔다. 복잡한 마음을 추스리려 너와 만났다. 눈이 내려 온통 새하얘진 동네는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거리를 누볐고 나는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김을 호호 불며 너를 기다렸다. 추워서 콩콩 뛰면서도 네가 나올 방향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확인했다. 오늘따라 바람이 찼다. 혹여 네가 아픈 건 아닐지 걱정도 되었다.

저 멀리서 하늘색 점퍼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쓴 소년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단박에 그가 너라는 걸 알아차렸다. 콩콩거리며 너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눈치 없는 신호등은 초록불로 바뀔 생각을 안 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41분. 고개를 들자 내게로 달려오는 네가 보였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날씨 미친 것 같지 않냐?”

“눈 와도 이상할 게 전혀 없을 듯.”

“괜한 소리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리가 앉은 나무를 지나쳤다. 코 끝이 찡해서 하고 있던 목도리를 올렸다. 입이 가려졌지만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너는 털장갑을 낀 손으로 내 귓볼을 감쌌다. 나는 따뜻함에 놀라 너를 돌아 보았다.

“좀 따뜻하냐?”

“…….”

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추워서 그런 것이라고 부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나를 바라보며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였지만 나는 따뜻해졌다. 눈만 바보같이 깜빡거리는 날 보며 너는 조금 키득거렸다. 갑자기 주위가 확 더워져 네 손을 떼어 냈다. 너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었다. 눈 씻고 봐도 아까의 웃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따라 걸었다. 우리는 목적지도 없이 떠돌았다. 너는 자꾸만 주변을 기웃거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고 나는 네 뒤꽁무니만 바라보며 너를 졸졸 따라갔다.

“우리 숨바꼭질 할래?”

“뭐라고?”

“숨바꼭질 하자고.”

“우리가 애냐?”

“그럼, 애지. 여기부터 저기까지. 시작.”

제멋대로 가위바위보를 한 탓에 내가 술래가 되었다. 나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너는 내가 술래가 되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근처 전봇대에 비스듬이 기댔다. 머릿속으로 1부터 10까지 세었다. 곧 3학년이 되는 소년이 숨바꼭질이라니. 왠지 웃겼다.

1…2…3……8…9…10.

눈을 떴을 땐 주변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왠지 조금 더 차갑고 싸한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네가 숨을 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헉헉거릴 때까지 돌아다녔지만 널 찾지 못했다. 메시지를 해도 전화를 해도 답이 없었다. 신호음이 끊길 때까지 걸어도 받질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다친 걸까, 어디가 아픈 걸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불안은 커지고 커져 거의 가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그때, 입술 위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작게 흩날리던 눈발은 거세지고 곧 무수히 내리기 시작했다.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얗고 빨갛게 질린 손아귀에 김을 호호 불었다. 겨우 조금 열이 난 손으로 귀를 감쌌다. 아까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자꾸만 나쁜 상황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짜증이 확 솟구쳤다. 입 속 깊은 곳에서 김이 올라왔다.

바닥에 주저 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숨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다. 눈은 계속 내려 머리 위에 소복이 쌓였다. 얼굴이 빨개져선 귀에 휴대폰을 가져다댔다. 신호음. 기대조차 안 했다. 눈을 감고 전봇대에 기대었다.

—여보세요?

“……?”

휴대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타고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바다야.”

—응?

“너, 어디야.”

크게 심호흡을 하며 차가운 목소리를 꺼냈다.

—……아무 곳도 아니야.

“…….”

—집에 빨리 가, 여름아.

“너, 잠깐…잠깐만.”

—뚜 뚜 뚜.

전화가 끊겼다. 나는 허탈감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네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한데, 넌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 숨은 걸까. 왠지 더 이상 널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렁거림이 치솟았다. 속이 안 좋아졌다. 집으로 걸었다. 차가운 눈이 눈썹을 적실 즈음 눈에서 뜨거움이 느껴졌다. 곧 그것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턱에서 꺾여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
영원은 그렇듯-리도어
제 인생 노래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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