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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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6 20:56조회 55댓글 5ne0n.
파도는 늘 다른 속도로 밀려왔다가 흰 포말을 남긴 채 물러가고, 흰 모래는 그 위에 남은 흔적들을 금세 삼켜버렸다.

나는 발끝에 닿은 유리병을 주워 들었다. 오래된 유리병임이 분명했다. 햇빛에 빛바랜 종이에는 글씨가 희미하게 번져 있었고, 뚜껑은 바닷물에 부식되어 겨우 닫혀 있었다.

손끝에 닿는 딱딱한 유리병의 감촉에서 누군가의 숨결과 마음이 오래전부터 이곳을 떠돌았다는 걸 느꼈다.

조심스럽게 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반듯하게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편지는 세월의 흔적처럼 노랗게 바래 있었지만, 글자 하나하나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목소리가 살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글은 마치 어린 시절의 일기같았다.

“처음 이 바다에 와서 너를 봤을 때, 바람과 파도 소리만큼이나 마음이 떨렸어. 이름도 모르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지만, 그 순간의 너를 기억하고 싶었어.”

그 글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는 희미한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햇살이 부서지는 모래 위에 서 있는 사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나는 그때의 어린 나를, 그리고 편지 속의 순수했던 그 우리를 동시에 느끼며, 세월을 넘어 전해진 마음의 온기를 조용히 마음에 녹였다.

파도는 계속해서 밀려와 부서졌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바다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누군가의 기억,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고갤 든 기억이 함께 녹아 있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조심스레 접어 유리병 속에 넣고, 또 다른 쪽지를 그 안에 넣어 바다로 흘려보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글을 읽게될 것이라 믿으며.

@ne0n. 지나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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