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날처럼 따스했고, 여름바다처럼 시원했던 그 마음
그해 봄은 런던답지 않게 맑았다.
겨울 내내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봄 역시 비와 함께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었다. 오래된 성당의 첨탑 위로 햇빛이 걸려 있었고,
길 건너편 공원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그 새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 이제 정말 끝이구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게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라고 했고, 아버지는 첫인상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둘 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로 믿지는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피터팬이었다.
나는 여덟 살 때 처음 그를 만났다.
처음에는 꿈이었다.
열 살이 되었을 때도 꿈이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꿈이라고 불렀다.
그럴만하다.
'다 큰 어른들에게 동심은 꿈과 같았을 테니까.'
열세 살이 되자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네 살이 되던 겨울, 피터팬은 마지막으로 내 방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제 네가 나보다 키가 크네.”
그가 말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너는 하나도 안 컸잖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못 올지도 몰라.”
그날 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그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몸은 점점 자라나지만, 마음은 아직 어린 나이에 멈춰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추억을.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정말로 그를 잊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어른이 되면 그런 것들을 잊어야 하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세뇌당해왔다.
교실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작았다.
오래된 학교였다. 창문은 높았고 복도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벽에는 백 년도 더 된 졸업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아갔다.
창가였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려다가 멈췄다.
그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 눈.
갈색인지 금발인지 모를 머리.
조금 마른 얼굴.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익숙한 웃음.
“오랜만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여기 네 자리야.”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터?”
그가 웃었다.
“그 이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그 순간, 나는 내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정말 피터팬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피터팬과 똑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피터는 학교생활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했다.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이.
선생님들은 그를 평범한 학생으로 생각했다.
아이들도 그랬다.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에게 부모가 있는지, 어느 학교에서 전학을 왔는지도 묻지 않았다.
마치 그는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나만 빼고.
나는 매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연필을 돌리는 모습.
책상에 엎드려 조는 모습.
급식으로 나온 생선이 싫다며 내 접시에 몰래 올려놓는 모습.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바람이 좋다.”
“바람이 좋은 날도 있어?”
“있지.”
“뭐가 다른데?”
그는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잖아.”
나는 웃었다.
“사람은 못 날아.”
“너는 어렸을 때 날았는데.”
그 말에 웃음이 멎었다.
그랬다.
어렸을 때 나는 날 수 있었다.
침대에서 뛰어내리면 잠깐이나마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밤이 되면 어딘가 네버랜드로 가는 길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달빛을 따라가면 죽지 않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알고 있었다.
침대에서 뛰어내리면 아프다는 것을.
옷장 안에는 겨울 코트와 낡은 신발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죽지 않는 아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왜?”
피터가 물었다.
“뭐가?”
“왜 갑자기 슬퍼졌어?”
나는 창밖을 보았다.
공원 위로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냥.”
그가 말했다.
“너 요즘 ‘그냥’이라는 말을 많이 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임스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였다.
그는 피터와는 정반대의 아이였다.
피터가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았다면, 제임스는 언제나 앞을 보았다.
피터가 내게 세상 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제임스는 내가 실제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험이 끝나면 같이 기차를 타고 바닷가에 가자고 했다.
학교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다.
새로 생긴 작은 서점에 가자고 했다.
아주 평범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이 좋았다.
누가 그랬던 것 같다.
평범한 것이 곧 행복이라고.
어느 날 저녁, 제임스와 학교 앞을 걷고 있었다.
해가 길게 기울어 오래된 건물들의 벽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제임스가 말했다.
“너랑 있으면 편해.”
나는 웃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그가 웃었다.
“너도 자주 쓰는 말이잖아.”
나는 웃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피터가 내 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왔어?”
내가 물었다.
“응.”
“오늘 왜 그래?”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 이제 여기 좋아하나 봐.”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인데?”
“여기.”
그가 말했다.
“네가 사는 곳.”
잠시 후 그가 웃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웃음이었다.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
그런데 그날은 처음으로 그 웃음이 슬퍼 보였다.
“그럼 됐어.”
“뭐가?”
피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피터팬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내가 자라는 동안 나 대신 어린아이로 남아 있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 밤,
창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내가 알고 있던 어떤 계절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By Day
https://curious.quizby.me/dais…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시험기간이신 분들 모두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