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무 말 없이 다정하게"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교실 안도 어느새 긴팔과 목도리로 꽉 찼다.

점심시간,
나는 교실에 남아 뒷자리에 앉아 있는 강수현을 바라봤다.

수현이는 조용히 책상 위를 정리하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머그컵 크기의 조그마한 핸드크림 통이었다.
그걸 조심스럽게, 한 번 더 닦고 포장지로 감싼 다음
살짝 고민하다가
이보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강수현의 마니또는 이보민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아마 단순한 게임 이상이었다.

"야, 보민이 또 선물 받았어!"
임서아의 외침에 애들이 고개를 돌렸다.
보민이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가, 조심스럽게 핸드크림을 들여다봤다.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겨울에도 손 마를 틈 없이 촉촉할거야.'

보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웃었다.
그 표정이, 진짜 고마움을 담은 미소였다.

그날 오후.
청소시간.
나는 교실을 쓸고 있었고 뒤에서는 수현이가 아무 말 없이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보민이는 먼저 복도 청소를 끝내고, 수현이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

"도와줄까?"

수현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 괜찮아."

"괜찮아도.. 도와줄게."
보민은 그렇게 말하며 함께 걸레를 들었다.

둘은 말없이 닦고, 말없이 교실을 한 바퀴 돌았다.
다 끝낸 뒤, 수현은 잠깐 보민을 봤다.

"...고마워."

"나도."

딱 그 두 마디뿐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많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둘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이렇게 조용한 교실 한 곳에서,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다정하게 누군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15화 "진짜 너면 나한테 좀만 더 잘해"

"야, 정준호. 너 진짜 어제 내 필통에 또 이 사탕 넣었지?"

3교시 쉬는 시간, 오늘도 김시연의 추궁하는 듯한 목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나는 현우와 얘기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 또 시작이다.

"아니거든? 내가 왜 니 필통에 그걸 넣냐."
준호는 늘 그렇듯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손끝이 자꾸만 책상 모서리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그럼 이 젤리는 왜 들어 있었는데? 이거 어제 니가 사는 거 봤거든?! 하, 보민이 마니또나 하윤이 마니또는 누군지 진짜 1도 모르겠는데 내 마니또만 왜 이렇게 티가 나냐? ㅋㅋㅋ"
시연이 들고 있는 건 귀엽게 포장된 젤리 봉지였다.
안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작게 쓴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맛있게 먹어!'

"와~ 진짜 티 안 나게 쓰려고 왼손으로 썼나보네? ㅋㅋ"
임서아가 옆에서 킥킥 웃었다.

"하.. 니 마니또잖아. 니가 알아서 추리 좀 해보시지?"
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 말에 시연이 멈칫했다.

"...너 왜 자꾸 그래?"
"뭘?"

"너.. 다른 애들한테 대하듯이 똑같이 대해주면 안돼?
내가 딴 애들이랑 다를게 뭐야? 너 내 마니또잖아..
그럼 나한테 더 잘 대해줘야 되는거 아냐??"
김시연은 그동안 쌓아왔던 울분을 토해내듯 말했다.

준호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시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복잡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날 오후.
교실은 청소시간을 앞두고 어수선했다.
준호는 아무도 없을 때 시연이 책상 위에 조그만 초콜릿을 조용히 올려놨다.
쪽지는 없었다.
딱 초콜릿 하나.

그걸 시연이 발견한 건 청소 끝나고 모두가 집에 간 뒤였다.
내가 복도에서 신발을 갈아신고 있을 때 교실에서 작게 소리가 들렸다.
"...진짜 뭐야."

복도 창문으로 본 김시연은 입꼬리를 참으며, 시연은 초콜릿을 조용히 가방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너가 내 마니또면, 나한테 좀만 더 잘해.."

16화 "그냥.. 의심은 할 수 있잖아?"

"야, 민규야. 너 진짜 모르겠냐?
너한테 초콜릿 준 사람, 임서아 아니야?"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강현우는 엎드려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민규에게 물었다.
민규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왜? 오늘은 왜 또 임서아인데?"
"아니, 지난주 금요일에 너 운동장 끝에서 전화할 때, 임서아도 걔네 무리에서 나와서 혼자 조용히 있었거든? 타이밍이 딱 맞았다고. 어때 서준아, 일리 있지?!"
"야... 그건 그냥 우연이지. 넌 왜 다 의심하고 다녀. 니가 뭐 탐정이냐?"
"그냥.. 의심은 할 수 있잖아?"

현우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반 애들이 하나둘씩 들키는 사이,
자기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애도 드물다는 사실이 괜히 불편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그럼 넌 누가 너 마니또 같냐?"
민규가 물었다.

현우는 잠깐 생각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진짜 모르겠어.
근데 하나 확실한 건, 김하윤은 아닌 거 같아."

"하윤이는 왜?"

"걔 마니또는 전에 감기 걸렸을 때도 선물 줬다며?
근데 나는 저번에 아팠을 때도 아무것도 없었어. 걔 성격 상 받은 만큼 돌려준단 말이야! 아, 그리고 난 지금까지 진짜 받은 게 없어..!
마니또가 그냥 뭔가 주는 게 아니라 챙겨주고 도와주는 건가? 하.."

민규는 픽 웃었다.
"너, 좀 삐친 거 같은데?"

"아니거든."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진짜 그냥 마니또 게임인데도, 괜히 감정이 섞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나와 민규, 현우가 교실 뒤 사물함 위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현우는 옆에 앉은 민규를 바라보다가 툭 물었다.
"넌, 그럼 마니또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민규는 말없이 천장쪽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몰라.
근데 오늘 아침에 누가 내 책상에 음료수랑 포스트잇 붙여놨더라.
'힘내!' 라고."

민규는 그렇게 말하며 물을 가져 와 한 모금 마셨다.

현우는 그걸 보며 말없이 중얼거렸다.
"진짜… 다 마니또 하면서, 이상하게 진지해지네."

민규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넌 원래 진지하잖아.
근데 만약에 네 마니또가 김하윤이면 웃기겠다."

현우는 웃으며 말했다.
"진짜, 그건 상상도 못했는데.ㅋㅋ"

그리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머릿속은 또다시 뒤죽박죽한 마니또 판 속으로 빠졌다.

누가 누군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괜히 서로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이 게임의 가장 이상한 점이다.



17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12월 14일 월요일.
마니또를 한 지 2주 째 되는 날이었다.
교실은 언제나처럼 분주했고, 마니또 게임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근데 오늘은 뭔가 조용했다.

하윤이는 아침부터 종일 바빴다.
누군가에게 쪽지를 쓰고,
어떤 애한텐 작은 선물을 놓고,
쉬는 시간에도 계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앞에 있는 교과서도 안 넘기고,
수업도 귀에 잘 안 들어오고.

"야, 이서준. 멍 때리냐?"
현우가 툭 내 어깨를 쳤다.
"...아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멍 때리고 있었다.


점심시간.
하윤이가 김시연, 정준호랑 웃으며 떠드는 걸 보는데
괜히 심통이 났다.
정준호랑만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냥 기분이 좀 그랬다.
이상하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청소시간.
하윤이가 복도 창틀을 닦고 있었다.
난 창가에 기대어 있던 내 빗자루를 들고, 교실 끝 빈 공간을 쓸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창 너머로 보이는 겨울 하늘처럼
오늘은 나와 김하윤의 사이가 유독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하윤은 평소처럼 하교했고,
나는 뒤에 남아서 핸드폰만 멍하니 보다 집에 갔다.

이상했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는데,
하루 종일 그 애 생각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근데 너무 찝찝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닌 것 처럼.



18화 "첫눈"

12월 15일 화요일.

첫눈이 내렸다.

누구 한 사람의 말에 교실은 금세 웅성웅성 시끄러워졌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뜩 그 애 생각이 났다.


하윤이는 아침부터 여느 때처럼 평소 같았다.
웃고, 친구들과 떠들고,

눈이 올 때 창밖을 바라보며 눈 오는 걸 오래 바라봤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자꾸,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되자 애들이 우르르 나가고,
하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몇 발짝 나가다 말고, 뒤돌아보며 나에게 말했다.

"서준아. 같이 가자."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당황하지도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장에서
하윤은 조용히 걸었다.
말이 없는데, 그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눈 되게 많이 온다."
하윤이 먼저 말했다.

"...응."

"첫눈이지?"

"그래?"

하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장갑이었다.
무늬 없는 회색 장갑 두 개.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그거."

"응? 이거, 하나 써."
하윤은 나에게 장갑 하나를 주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가 썼다.

나에게 한 번 슬쩍 웃고 뒤 돌아
눈 밭에 앉아서 눈을 작게 뭉쳤다.
그러고는 옆에서 이보민과 있던 임서아 쪽으로 가더니
눈을 던졌다.

그렇게 한참을 셋이서 놀더니 하윤이 혼자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왼 손에 뭉친 눈을 들고서.

그리고 예상대로 나에게 눈을 던졌다.
나느 한 번 쓱 웃고 김하윤에게 약하게 눈을 던졌다.

그렇게 우리 반은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까지
실컷 눈싸움하며, 눈사람 만들며 놀았다.

교실로 다같이 돌아가는 길에 임서아가 말을 걸었다.

"야, 이서준!... 너 되게 눈치 없는 거 알아?"
그 말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뭘 하려는 건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내가 물어보려 임서아를 봤을 땐
이미 저 멀리 앞으로 간 상태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교실에 앉았는데
책상 위에 작게 포개져 있는 핫팩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포장도 없고, 쪽지도 없고, 그냥 핫팩 하나가 끝이었다.

나는 무심하게 그것을 뜯어 살짝 흔들었다.
근데 그 순간, 따뜻한 그 핫팩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우는 기분이었다.

괜히 마음 한 켠이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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