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나도 널 좋아한다고 말 못 해줘서 미안해 [ 단편 ] + 좀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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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1 17:56조회 21댓글 0김비누
너는 울었다. 파도같이 휘몰아치며 찾아온 나의 첫사랑은, 추락했다.
***
어느 날 너와 함께 등교를 했던 날이였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내 맘에 너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지금 보면 사랑스러운 점들이, 그 때는 마냥 아니꼬웠다. 남들이 못났다던 그 찢어진 눈이 여우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김도훈."
"엉? 왜."
"아씨... 나 잠을 못 잤어. 오늘 시험인데... 넌 시험공부 했냐?"
아, 외마디 말을 남기고 너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아서 다시 말해달라고 말했지만, 별 거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그런 너가 답답해서 너의 어깨를 쳤다. 그러자 너는 나를 때리려 손을 올렸지만,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웬일인지 뭔가 이상했다.
"왜 이러는건데? 뭐 잘못한 거 있냐?"
"아니. 없는데? 그냥, 꿈자리가 별로였어."
"야, 그걸 말이라고..."
"미안한데, 박지윤. 우리 늦었거든?"
너는 핸드폰을 들어올려 시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늦은 시간이였다. 아이씨... 우리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달렸다. 달리고, 달렸다. 숨이 차올라서 헥헥거렸지만 나름대로 청춘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를만큼 즐겁긴 즐거웠다. 그 때는 알지 못했던 사소한 너의 배려들이 나에게는 멋진척이라는 단어로 와닿았다.
"들어가. 데려다줄게."
"뭐래, 늦었잖아. 여기서 헤어져. 멋진척 하지 마시고. 나 간다!"
"...박지윤, 진짜 지멋대로야..."
뒤돌아 달리면서, 널 향해 난 손을 흔들었다. 너는 어이없다는 듯, 뒤에서 아마 웃었겠지. ...이런 내가 뭐가 좋았던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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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다 풀었다, 3분 남기고...!'
다 풀자마자 문뜩 네 생각이 났다. 오늘따라 다운되어있던 너의 태도가 급작스럽게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정말 잘못이라도 한걸까. 아니면, 설마 나를 좋아하기라도...... 그럴리가 없지. 너는 그 때 내게 서해민을 좋아한다고 했었으니까. 도와달라고 그렇게 애원했으니까.
'김도훈 그 자식...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그 날따라 네 생각이 유난히 많이 났다. 짜증났다. 너가 뭔데 내 마음을 이렇게 어지럽히는건지. 얄미웠다. 이딴것도 사랑이라 치부할 수 있다면, 애증이라는 단어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너를 사랑하는것일테고, 너 또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것이다. 많은 이상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3분이 유난히 길었다. 네 생각으로 가득 차버린 3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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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안내방송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소식. 녹색빛의 피부를 가진, 눈이 뒤집힌 괴생명체가 지금 우리 학교에 돌아다니고 있다고. 감염을 시키고 있다고. 공포스러운 소식이 학교 전체에 전해지자, 모두가 시끄러워졌다. 평소 견원지간이던 아이들도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그나저나, 녹색빛, 감염이라면... 좀비...? 지금, 우리 학교에서 좀비가 배회하고 있다는거야? 나는 바로 김도훈, 너에게 디엠했다.
-야, 너 괜찮아?
-ㅇㅇ, 괜찮아. 너네 반으로 갈까?
-뭔소리야... 오지 마. 좀비 있어.
-빗자루 있어서 ㄱㅊ! 갈테니까 문 열어줘.
"미친 새끼...! 에이 설마, 진짜... 진짜 오겠어?"
내 어깨 위로 차가운 손이 닿았다.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내 뒤에는 천사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서해민이 보였다.
"누구 온대?"
"아, 아... 김도훈..."
"도, 도훈이-? ...저기 지윤아. 너 도훈이랑 친하잖아- 우리 좀비사태도 벌어졌는데 혹시 나... 도와줄 수 있어? 아, 이 타이밍에 말하는게 이상하긴 한데... 헤헤, 미안해. 나 도훈이 좋아하거든."
널 좋아한다는 서해민. 서해민을 좋아하는 너. 완벽한 커플의 탄생이였다. 나는 가슴 한켠에서 왜인지 저릿한 느낌이 들어왔다. 그 당시에는 부러움이라고 생각했다. 친한 남사친이 나보다 먼저 솔탈을 해버릴 것 같아서. 아마 아니였을거다.
-야, 열어줘.
-...? ㅁㅊ, ㅇ알겟ㅅ러
진짜 왔다고-? 놀란 마음에 오타가 잔뜩 났다. 문을 잽싸게 열었다. 너였다. 가장 먼저 걱정된 네 모습이 보이자 눈물이 나올 뻔 했지만 참고 말했다.
"미친새끼야,... 왜, 왜 왔어...! 좀비 있던데, 괜찮아...?"
"너 겁나게 약하니까 걱정돼서 왔다, 왜? 오면 안되냐? 그리고 좀비... 개무섭긴 했어.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강하냐? 큭큭."
"약골새끼가 뭐래... 나도 강하거든? 멋대로 걱정하지마."
괜히 심술이 나서 너에게 못되게 굴었다. 두근거렸다. 걱정? 지가 뭔데 걱정은 걱정이야... 이런 생각과는 반대로 심장은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정상적이게 뛸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때부터 너가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정말, 자연스럽게.
"저기, 도훈아!"
서해민의 가늘고 고운 목소리. 마치 꾀꼬리같은 목소리가 조금 짜증났다. 착해빠진 서해민이 처음으로 미웠다.
"잠깐 말할 게 있는데... 이리로 와줄래...?"
웃으며 서해민이 말하자, 너는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여기서 말 해."
"...아, 아... 응! 저기 있잖아 그... 나, 나아- 너 좋아해. 나랑 사귈래...? 이 상황이랑 안맞다는거, 나도 아는데..."
"알면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그래 알겠어. 근데 난 너 안좋아해. 사귀진 못 하겠다."
내 귀를 의심했다. 서해민을 좋아한다며? 얼굴을 붉힌건 뭔데? 나랑 거리를 뒀던건 뭔데? 나는 미쳤냐는 눈빛으로 너의 등을 쳐댔다. 왜 이러냐고.
"..."
서해민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굉장히 짜증난다는 듯한 얼굴이였다. ...무서웠다.
"...아이씨...! 야, 김도훈. 너 나 좋아했잖아? 너 때문에 착한 척 연기하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박지윤, 저 멍청한, 하... 쟤한테도 말했잖아. 날 좋아한다고-!! 근데 왜 이러는건데!! 아아, 그랬던거네. 너 박지윤 좋아하니? 박지윤, 너도 쟤 좋아하지? 하, 하하... 나 속은거야? 속인거네. 재밌었어? 재밌었냐고. 재밌었냐고 묻잖아...!!"
분노에 사로잡힌 서해민의 모습이 마치 좀비와도 비슷하게 보였다. 미친듯한 서해민은, 결국 문을 쾅소리나게도 크게 열고는, 우리 둘을 갑자기, 팍 밀었다. 아니, 너는 그렇다쳐도 나는 왜-
"아, 씨이...-! 미친, 좀비 겁나 많은데 우리 어떡해...? 응...? 도훈아, 김도훈...!"
"야, 박지윤. 나 지금 겁나 떨리니까 한 번만 말해줄거야. 잘 들어 봐."
너는 떨리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이미 다운되어있던 분위기가 더 어두워졌다. 계단 너머로 좀비가 보였다.
"...박지윤, 나 너 좋아해. 서해민 좋아했다는거도 다, 거짓말이야. 이제 좀비들이 몰려올거야, 아까 서해민이 크게도 소리쳤으니까. ...내가 미끼가, 될게. 너는 내 몫까지 살아서 나가. 1층이니까 창문으로 나가도 괜찮을거야. 119는 신고 했어. 오늘이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인 줄 알았으면,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줄 걸... 미안해, 지윤아. 좋아해, 좋아해..."
나를 세게 끌어안은 너는 훌쩍였다. 크게만 느껴졌던 너가 처음으로 어린 아이로 보였다. 너는 이만 나를 놓아주고 어서 가라며 소리쳤다. 가라고, 그만 나를 비참해지게 하라고.
미안해, 도훈아. 정말 미안해. 그 때 아직 좀비가 몰려오지 않았을 때 창문으로 우리 둘이 같이 도망쳤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내 옆엔 너가 있었을까? 나와 울어주고 웃어줄 수 있었을까? 너는 마지막까지 다정했고 착했으니까 아마 천국 갔겠지? 나만 가면 되겠네. 나, 너 만날때까지 착한 일 많이 해서 죽으면 바로 너 만나러 갈게. 다시 한 번 미안해. 그리고 정말 좋아해. 그 날 나도 널 좋아한다고 말 못해줘서 미안해. 좋아해,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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