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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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9 19:05•조회 45•댓글 4•여우비
*이번 회차는 전 회차와는 다르게 또 다른 주인공인 ‘너’의 시점으로 쓰였습니다.*


여름아, 내가 왜 도망쳤는지 알고 있니? 아마 네가 이걸 읽지 않는 이상은 평생 모를 거야. 너도 알겠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를 자주 때리셨어. 나는 꼬꼬마 때부터 맞고 살아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크면서 부모님의 행동이 잘못된 거라는 걸 깨달았어. 그때 내 심정이 어땠을 것 같아? 이것도 짐작이 안 되겠지. 그래. 넌 너무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니까.

언제부터 맞고 자랐는지를 더듬어 보니까 딱 우리 형이 죽은 해부터 그랬더라고. 착잡하더라. 형의 죽음 때문에 내가 맞고 사는 건가, 하는 생각. 그런데도 내가 말했잖아. 부모님은 형의 죽음을 나에게서 지우신다고. 전 편지에서 형의 기억이 없다고 말했었는데, 사실 거짓말이야. 드문드문 기억이 나. 지금의 나랑 꼭 닮았던 형 말이야. 부모님을 이해하라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는데, 대부분 부모님이 형을 잃어 슬퍼하시니 말을 아끼라는 것들이였어. 형이 죽기 전엔 한없이 다정한 부모님이었어. 너는 형이 죽은 후의 나와 부모님만 만나 봐서 아마 모를 거야. 이제 보니 너에게 참 비밀이 많았네.

거긴 어때? 이곳은 차가워. 너무 차가워. 나가고 싶어. 넌 절대 이곳에 오지 않길. 네가 추위에 약하다는 것 쯤이야 잘 알고 있어. 그니까 넌 살아. 무슨 일이 있어도 악으로 깡으로 버텨. 내 몫까지 열심히 살라는 말은 진부하잖아. 그러니 네 몫을 다해 있는 힘껏 살아 남아. 절대 이곳에 오면 안 돼. 나는 날 위해 죽음을 택한 거야. 너도 널 위해서 죽어야 해. 아주 먼 훗날.

이기적이라는 거 잘 알지만 말야. 나는 네가 내 죽음에 있는 힘을 다해 슬퍼하길 바랐어. 목이 메일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고, 주저 앉아 이성을 잃길 바랐어.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죽음을 택했다는 뜻이야. 주위 사람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설령 그게 너라고 하더라도. 이걸 읽게 되면 날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난 이미 존재하지 않는 걸. 나는 네가 엉뚱한 곳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길 바라. 참 모순적이다. 날 위해 울어 주길 바라면서 엉뚱한 데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하다니.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가 아직 많이 있어. 사실 어릴 때의 난 너를 종종 질투하곤 했어. 그때 당시 넌 성적도 좋고 쾌활한 성격으로 반에서 인기도 꽤 있었지. 나는 그런 네가 내심 부러웠어. 너도 알겠지만 나는 아주 소심하고 겁 많은 아이였으니까. 지금은 홀가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전엔 내 성격이 너무 싫었어. 도망치고 싶었고 네 것을 탐내기도 했어.

알고 있어. 내가 아득바득 노력해 봤자 너와 친구로 지내는 이상 별다른 이득이 없다는 걸. 그래서 그냥 잊었어. 뭐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그 잊는다는 게 정말 어려운 거라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지울 수 있어. 너와 나에 대한 기억까지도, 전부.

있지. 나는 질투심이나 부러운 감정이 들 때마다 이런 생각으로 버텼어. 주위에 사람은 많지만 정작 네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고. 내가 널 구원해 준 거라고.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너에게 구원 받았던 건지도 모르지. 너는 너무 맑아서, 한없이 어두운 내가 다가가면 안 되는 존재 같았으니까. 그게 다야. 나는 슬퍼서 간 것도 화가 나서 간 것도 아니야. 그러고 싶어서. 내가 너무 비참해서 그래. 죽으면 덜 비참해지지 않을까, 하는 너무나도 바보 같은 생각에 사로 잡혀버린 거야. 자책은 이제 그만하고 네 갈 길 가.

아직도 난 내가 너를 구원했다고 여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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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가 많아 도망치고 싶었으나 꾹 참고 이번 회차를 완독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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