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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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3 23:53조회 72댓글 1
// _ 프롤로그

19XX . X . XX

그곳의 노인은 내게 친절을 베풀듯 말했었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바스러질 목숨이니, 남은 수명을 모두 태워 딱 일주일짜리 불꽃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난 제일 먼저 윤슬의 생각이 났다. 내가 만약 이대로 끝나버리면 내 손을 잡고 살아가던 그 애는 어떻게 하지, 하고.

그 애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 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지푸라기가 아니라 실오라기라도 좋으니까, 슬이가 정말 내가 필요할 때,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을 때 붙잡고 버틸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두고 싶었단 말이다. 그게 비록 일주일 만에 터져버릴 눈속임이고 가짜면 어때. 슬픔으로부터 우리 슬이 눈을 가려줄 수만 있다면 난 뭐라도 좋았다.

_ 혁이 너, 요즘 꼭 딴사람 같아.

식탁 마주편에 앉아 내가 좋아하던 반찬들을 부지런히 날라주던 슬이가 웃었다. 나를 살리겠다고, 이 초라한 목숨 하나 붙잡아보겠다고 제 젊음을 다 바쳐 온기를 불어넣어 주던 영원이였다.

네가 준 온기 덕에 내 마지막 일주일은 비눗방울처럼 찬란하게 부풀어 오르는 듯 했다. 동시에, 시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내 살점 같은 시간들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슬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일을 이야기했고, 이미 다 써버린 내일 대신 그 애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약속된 일주일이 지나, 거짓말처럼 모든 게 끝났다.

짐을 정리하느라 하루가 꼬박 걸렸다.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배 속도 텅 비었지만 어쩐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그대로 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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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사는 이사고 일은 일이다. 내일은 평소대로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낯설고 딱딱한 새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어쩔 수 없이 계속 걱정만 했다.

혁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아마 지금쯤이면 그 애도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겠지. 지난 몇 년간 함께 누워 잠들었던 바로 그 침대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슬퍼할까, 아니면 차라리 시원해할까. 혁이도 내가 정말로 떠났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이 이제는 분리되었고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잡생각이며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나와 달리, 혁이는 좀 냉혈한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지금 혁이는 아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 있을 것이 틀림없다. 내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졸지 않으려면 잠을 청해야 할 테니까. 슬픔도 아쉬움도 없이, 나처럼 어둠 속에 누워 헤어진 옛 연인을 추억하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내게 일주일 동안 세상의 모든 온기를 쥐여주고 떠난 그 애가 정말로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베개에 뒤통수를 꾹꾹 누르며, 울다 보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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