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 A

설정
2026-08-10 22:33•조회 36•댓글 0•여우비
하굣길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벌써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몇 달만 지나면 우리는 방학을 한다. 교문 옆 담장에 비스듬이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널 발견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질락 말락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야!”

내 외침에 네가 고개를 돌린다.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며 웃는다. 설렁설렁 뛰어서 네게로 갔다. 네 휴대폰 화면을 스윽 보니 텅 빈 메모장이었다.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나란히 발걸음을 맞춰 길을 걸었다.

“있잖아. 너는 만약 지금 지구 어딘가에 공룡이 존재한다면 어떨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다 죽었는데 무슨 수로. 역사는 안 바뀌어.”

이건 무슨 질문인지 원. 괜히 심드렁해졌다.

“아니 왜, 만약이잖아. 만약.”

“글쎄.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거라면 내 알 바는 아니지 않을까?”

“…….”

그 뒤로 너는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얘는 항상 이렇다. 쓸데없는 공상이나 망상에 빠져 있다. 늘 말이지.

몇 분 더 걷다보니 학원가에 도착해있었다. 너와 함께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조용히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아이가 대다수였다. 나는 너를 안쪽으로 밀어넣고 그 옆에 섰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아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사람 존나 많네.”

“…….”

내 혼잣말을 너는 모르는 척 했다. 괜히 민망해져 발만 동동 굴렀다. 학원 문을 밀어 열고 교실로 들어갔다. 나와 반이 다른 너는 B반으로 들어갔다. 수업은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했다. 누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걸 선생님에게 들켜 폭탄 잔소리를 들었다. 뒷자리인 나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스르르 눈이 떠졌다. 앞자리 아이들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잠깐 눈만 감았다 떴는데도 삼십 분은 지나가 있었다. 미친. 기다리고 있을 너를 생각하며 손놀림을 분주히 했다. 헐레벌떡 가방을 매고 학원을 벗어났다. 먼저 갔는지 너는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기색을 꾹꾹 누르며 집으로 향했다.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쌓인 메시지나 통화 기록은 없었다. 워낙 특이한 아이라서 그렇다고 여기며 애써 나쁜 생각들을 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나를 기다리던 너였다. 그런 네가 없으니 조금—사실 많이—허전했다.

*

날씨가 비교적 쌀쌀해져 슬슬 패딩을 꺼냈다. 12월 초였다. 다들 연말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잰걸음으로 교문을 통과했다. 신발장에서 너를 마주쳤다. 며칠만이었다. 네가 가족들과 해외 여행을 간 탓에 보지 못했다. 나는 자연스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잘 다녀왔냐?”

“그럭저럭. 역시 집이 최고더라.”

“어이구. 복에 겨운 소리 하시네. 누구는 비행기 한 번 못 타봤는데.”

일부러 말을 장난스럽게 늘이며 녀석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부드러운 코트의 촉감이 꽤나 좋았다. 티격태격하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반에서 좀 잘난 여자애들이 교실 문 앞에서부터 온갖 지랄들을 떨고 있었다. 너는 그걸 가볍게 무시하고는 자리로 가 앉았다. 나는 다른 곳을 쳐다보며 들어가다가 머리를 맞을 뻔 했다. 태연한 네가 왠지 좀 이상해보였다.

“뭔 일 있냐? 기운이 없네.”

“딱히? 그냥, 추워서.”

“연약한 새끼.”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말을 하기엔 나는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더럽게 추워서. 수업을 하다가 네 자리로 자연히 눈길이 갔다. 너는 수업은 안 듣고 무언가 열심히 낙서를 하고 있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억지로 눌렀다. 항상 이런 식이지.

“아까 뭘 그리 열심히 그렸냐?”

내 말에 네가 공책을 펴 내 눈 앞에 들이밀었다. 지구 반대편에 공룡들이 득실거렸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냥 늘상 하는 공상인줄 알았는데 뭔가 더 깊이 파고든 거였나.

“공룡에 왜 그렇게 집착하냐? 네가 애야?”

“아직 애는 맞지. 공룡은 그냥, 멋있잖냐.”

그런 말을 하며 웃는 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런가. 멋있나, 공룡이. 갑자기 공룡을 동경하고 싶어졌다. 순수하게.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우비라고 해요.
게시판은 띄어쓰기가 다 사라지네요…. 아쉽.
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