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보이지 않는 여름
||| 딸기맛 슬러시
어제 여름이가 건넨 남아 있던 쿠키는 독서실 독서대 가장 아늑한 구석에 얌전히 모셔두었다.
공부하다 풀리지 않는 문장에 막힐 때마다 하나씩 집어먹었는데, 신기하게도 초코칩의 달콤함보다 노릇하고 고소한 버터 향이 먼저 입안 가득 맴돌았다.
그 냄새가 퍼질 때면 어제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던 손끝의 뜨거운 열기가 자꾸만 떠올라, 괜시리 손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
시계의 시침이 숫자 10에 딱 얹혔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해 오던 버릇처럼 가방끈을 다잡아 매고 묵직해진 걸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익숙한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낮의 열기가 덜 식은 밤공기 사이로 시원하고도 상쾌한 향이 낮게 흘러나왔다.
여름이네 집에 도착하고,
곧이어 머리 위쪽에서 드르륵하며 창문 틈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가로등 불빛이 슬며시 걸쳐진 여름이네 2층 창문이 큼직하게 열려 있었다.
"서준아! 위에 봐, 위!"
창문 틈새로 여름이의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 솟아올라 허공을 저었다.
손에 쥐여 있는 건 문방구 앞 작은 플라스틱 컵.
"나 아까 엄마 몰래 슬러시 사왔지롱. 너 주려고 냉동실에 꽁꽁 숨겨 놨다?"
여름이는 슬러시 컵을 오밀조밀 흔들며 아이처럼 자랑했다.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맑게 튀어 오르는 목소리와 손짓만으로 가슴 한구석이 튀어올랐다.
"대박. 이 밤에 슬러시라니. 안 녹았어?"
"응! 먹기 딱 좋게 자잘하게 얼어있어. 나한테 엄청 고마워해야 한다? 하핫."
여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컵을 꼭 쥔 손을 오르내리며 어깨를 흔들고 있을 여름이의 신난 표정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아무튼 나 금방 내려갈 테니까 거기 딱 서 있어!"
창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더니, 곧이어 마당 안 쪽에서 바스락거리며 내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담벼락 밑, 주먹 하나가 겨우 넘어갈 만한 작은 틈새 앞에 쪼그려 앉았다.
||
잠시 후, 거친 숨소리와 함께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틈새 밖으로 쑥 밀려 나왔다.
"짜잔. 얼른 잡아. 손 엄청 시려."
"고마워. 진짜 잘 먹을게."
슬러시 컵을 받아든 순간, 얼음장 같은 한기가 손바닥을 타고 찌릿하게 타고 올랐다. 가로등 불빛 아래 컵을 살피니 한가운데에 길쭉한 빨대가 툭 꽂혀 있었다.
그 안에는 붉은빛 살얼음이 빼곡하게 들어찬 딸기 슬러시가 찰랑이고 있었다. 가로등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모양이 꼭 작은 보석 덩어리 같았다.
슬러시를 머금으려 입을 대려던 순간, 나는 동작을 멈췄다.
살얼음을 떠먹으라고 만들어진 넓적한 숟가락 모양이 위쪽으로 가 있고, 정작 음료를 빨아먹어야 하는 둥근 구멍이 바닥 쪽에 박혀 있었다. 빨대가 통째로 거꾸로 꽂혀 있었던 것이다.
"여름아."
"응? 왜, 맛없어?"
담장 너머에서 여름이가 은근한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아니... 너 의외로 진짜 칠칠치 못하다."
"내가 왜?"
"빨대 거꾸로 꽂았잖아. 퍼먹는 스푼 쪽이 위로 오면 음료가 안 올라오는 거 아냐?"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타박했다.
순간, 담장 너머로 조용한 정적이 툭 떨어졌다. 여름이는 당황한 건지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이내 담벼락을 툭 찌르며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 몰라! 냉동실에서 삐걱거리는 걸 급하게 빼내오느라 그랬지. 어두워서 통 안 구별이 안 가더라고. 그냥 그대로 마시든가, 네가 쏙 뽑아서 다시 꽂든가!"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나는 피식 웃어버리며 빨대를 뽑아 위아래를 똑바로 바꿔 깊게 꽂아 넣었다.
둥근 구멍으로 빨아올리자, 머리가 띵해질 만큼 차갑고 달콤한 슬러시가 목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종일 꽉 막혀 있던 머릿속이 시원한 딸기 향과 함께 단번에 트이는 기분이었다.
"맛있다. 진짜 하나도 안 녹았네."
"거 봐, 내가 얼마나 보물 다루듯 모셔왔는데."
여름이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는지 벽에 등을 툭 기대며 조용히 웃어댔다. 나도 제대로 꽂힌 빨대를 물고 슬러시를 오물거리며 나란히 담벼락에 몸을 기대앉았다.
어딘가 어설프고 엉뚱한 여름이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슬러시를 천천히 삼켰다.
컵 겉면에 빼곡히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손등을 타고 맺혀 떨어졌지만, 입안 가득 맴도는 달달한 맛에 그저 바보처럼 웃음만 새어나오는 밤이었다.
|||
໒꒱
https://curious.quizby.me/Ange…✎
https://curious.quizby.me/yu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