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9 15:55•조회 79•댓글 5•세리아
1999년은 무섭도록 불완전한 해였다. 천 년 단위로 찾아오는 네 단위 숫자가 모두 바뀌는 날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컴퓨터가 날짜가 바뀌는 걸 감당하지 못해서 제어가 불가능해질 것이라던가 핵폭탄이 터진다던가 백 년치 연산이 한꺼번에 진행된다던가 그런 말들이 많았다. 세기말이라 그런건지. 연말도 아닌데 매일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것처럼 왠지 긴장되기도 무섭기도 설레기도 한 날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나는 구십구년을 맞아 고삼이 됐다.
*
불우한 가정사 탓인지 난 어릴 적 보던 소년만화를 고등학교에 올라와서까지 끊질 못했다. 영웅으로 묘사되는 사람들이 모두를 지키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든 불의와 폭력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이상적이게만 보였다. 다 크고 나서까지도.
이십세기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사람을 바래왔다. 지독하고 더러운 하루하루에 뭔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액션가면이나 파워레인저 같은 영웅들이 내 인생 한바탕 휩쓸고 갔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하늘에서 뿅 하고 구원자 한 명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들려온 전학생 소식은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십일반에 복학생 전학왔대!”
진짜 존나게 잘생겼다는 말은 함성 소리에 묻혔다. 여덟시부터 저녁 아홉 시까지 교실에 틀어박혀 사는 고삼들에게 전학생. 그 세 글자는 지독한 도파민이었다.
내 친구 이유석도 반쯤 미쳐서는 온갖 괴성을 질러대는 저 무리 사이에 껴 있었다. 이유석은 선두로 나가 전학생 척결을 외쳐댔다. 복학생이든 뭐든 그들에겐 새로 나타난 싸움 대상에 불과했다. 기강도 없으면서 서열 정리라나 뭐라나. 그들은 떡처럼 뭉쳐서 다같이 십일반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폭풍 끝에 반에 남은 건 나 하나였다.
난 매일 하던 대로 가방에서 만화책을 꺼내 익숙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일명 <히어로 세이버>. 모두 이름 한 번씩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이십세기 소년 만화였다. 책갈피를 넣어 둔 페이지을 펴자 멋들어진 남자 주인공이 악당들을 모두 물리치고 괴롭힘 당하던 소년 앞에 서서 꽃 한 송이 건네주는 장면이 나온다. 백 번도 넘게 읽었지만 이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다.
특히 드라마에서는 더 그랬다. 만화를 원작으로 짧게 드라마가 만들어졌던 적이 있는데, 만화 주인공과 똑 닮게 잘생긴 남자를 섭외했어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었다. 그것도 1화까지만이지만. 그 이후로는 인기가 점점 하락세를 탔다.
그 이유는 주인공의 부재 때문이었다. 당시에 열여덟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력과 출중한 외모로 칭찬이 자자하던 그 남자는 고작 삼 화 출현하고 말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을 건네는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그렇게 하차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반짝 스타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잊혔다.
이후로 주인공은 줄곧 애매한 얼굴이었다. 시청률이 반토막도 모자라서 반의반토막이 나자 방송사는 드라마를 조기 완결하고 끝냈다. 그리고 나는 고작 그 삼 화를 계속 돌려본다. 대사를 전부 외울 정도로 계속.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는……
“기적은 언제나 찾아오진 않아서 아주 먼 날에는 혼자 고난을 극복해야 될 날이 올지도 몰라.”
난 곧장 뒤에서 들려오는 중저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완전히 같은 대사였다. 그 분위기, 그 말투, 어쩌면 목소리조차 드라마 속 장면과 다른 점이 없었다.
왠지.
심장이.
“영웅은 한 사람만을 지켜줄 수는 없어. 그래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 때는 이 꽃을 보면서 날 떠올려봐. 히어로는 항상 모두의 마음 속에 존재하니까.”
난 떨리는 몸으로 삐걱대며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디비디에서나 보던 그 얼굴이 보인다. 하늘을 모두 담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만화책에 꽃혀 있었다. 난 후들대며 만화책을 품에 안았다.
“아, 아니…….”
“너 이 만화 좋아해? 드라마에 나 나오는데. 알아?”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연히.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름 하 청. 나이 스물두 살. 열여덟에 <히어로 세이버> 1화부터 3화까지 출연. 전부 읊어줄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이 봐온 얼굴인데, 얼마나 많이 들은 목소린데. 그런데도 고작 당신을 알고 있다는 그 말은 입에서 맴돌기만 했다. 몸이 굳어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십미터 달리기가 칠 초 대인 이유석이 거칠게 뒷문을 연 견 그때였다.
“권하빈 재미없는 새끼. 십일반에 전학생 없던데? 괜히 허탕이나 쳤어.”
이유석이 유일하게 잘하는 게 달리기였다. 교칙은 밥 먹듯이 어기는 주제에 선생님 눈은 잘 피해서 잘 혼나지도 않았다. 난 본능적으로 이유석이 하청을 봐선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 커다란 하청이 고작 나 한 명에 가려질 리가 없었다. 내 앞에 선 하청을 발견한 이유석의 표정이 굳는다.
“야 씨발. 너 누구야?”
이유석이 건들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남고는 이래서 싫다. 눈만 마주쳤다 하면 막역했던 사이끼리 치고박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청을 보니 무섭지도 않은지 계속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하청 피지컬에 밀리지 않는 이유석이 하청 코앞으로 가 고개를 까딱거린다. 금방이라도 맞붙을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참고로 이유석은 진짜 달리기만 잘한다. 싸움은 뒤지게 못하면서 시비는 존나 턴다. 난 도대체 누굴 걱정해야 하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제발 싸우지 말라는 눈으로 이유석을 바라보자 이유석이 하청 얼굴 쓱 훑어보더니 어깨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
“십일 반 복학생 형 맞죠? 잘생겼네요.”
“그래. 넌 이름이 뭐냐?”
“이유석이라고 합니다. 형님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하 청. 외자야.”
그제야 눈 크게 뜨고 날 바라보는 이유석. 맨날 하청 하청 말하던게 뒤늦게 떠오른 것 같았다. 내 집에서 디비디도 여러 번 봤으면서 눈치도 없긴.
“넌 권하빈 맞지?”
하청이 내 명찰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아, 네!”
“앞으로 얼굴 알고 지내자.”
하청은 그렇게 말하곤 반 애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유유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만약 우연히 하청을 만나게 되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상상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왜 하차했냐고, 연기는 그만둔 거냐고, ……팬이었다고. 그렇게 꼭 전해주고 싶었는데.
“아니 미친. 저 사람 그 사람이잖아. 너가 좋아하는 그 만화 주인공!”
이유석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청 얼굴만 머릿속에 아른아른 맴돌았다. 오늘부터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지만 스물둘이나 되어 왜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 사 년간의 빈 공간은 도대체 무엇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왠지 그 사람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다.
그 얼굴을 봤을 때 심장이 뛰었던 건 우연이었을까 하는 그런 착각.
아무래도 싸인을 받으러 가야겠다. 팬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러 가야겠다. 팬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하청도 분명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친한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난 그런 호기심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
칠교시가 끝나고 서둘러 십일반으로 뛰어갔다. 다행이도 그쪽은 아직 종례 중이었다. 하청은 기다리는 날 발견한 건지 제일 먼저 교실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선생님께 걸려서 십 분 동안이나 상담을 받았다.
“나 보러 왔어? 지금까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뭐라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줄게.”
난 진작 가져왔던 종이랑 펜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하청이랑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밖에 편의점 있어요.”
“야자 시작 전까지 갔다 와야겠네.”
난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저 야자 쨰고 싶은데.”
“모범생처럼 생겼는데 의외다?”
“그거 안 좋은 뜻이죠.”
“아니. 좋은 뜻.”
하청이 웃었다. 좋은 의미인 걸까?
“그래. 한 번쯤 뺴보지 뭐.”
“진짜요? 학교 첫날인데 괜찮아요?”
“넌 왜 네가 째자고 해 놓고 걱정이야? 괜찮아.”
왠지 데이트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야자를 무단으로 빼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런 건 실감도 나지 않았다. 눈 앞에 오직 하청만 있는 것 같았다. 내 만화 그리고 내 세상. 난 벌써 영웅에게 구원받은 것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학교 째는 거 내 버킷리스트였거든.”
“버킷리스트요?”
“어. 몰라?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소원 목록같은 거 있잖아.”
진로 수업 시간에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난 뭘 적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쓴 거야. 목록은 백 개 있는데 아직 세 개밖에 못 채웠어.”
“세 개면 많이 채웠죠. 소원 뭐였는데요?”
“학교 가기. 애들이랑 싸워보기. 수학 수업 안 졸고 전부 들어보기.”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기엔 지나치게 사소한 것들이었다. 스위스 가기나 서핑 배워보기 이런 멋있는 걸 기대했던 난 조금 실망했다. 나도 모르게 버킷리스트 목록이 왜 이렇게 초라하냐 물으려다 멈칫했다. 버킷리스트 얘길 하는 하청은 내가 본 가장 빛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 네 개 됐네. 학교 째기.”
난 왠지 하청을 돕고 싶어졌다. 난 하청과 몰래 운동장으로 나오고, 담을 넘기까지 줄곧 망설였다. 하루밖에 못 본 얼굴인데 너무 부담스러운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 청은 담 넘어본 적 없다고 말한 것치곤 쉽게도 넘어댔다. 담 잡고 낑낑대던 내가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난 하청 도움 받아 겨우 담 위로 올라갔는데 생각보다 바닥이 낮아서 뛰어내리지도 다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하청은 그런 내 모습을 비웃더니 두 팔을 활짝 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뛰어내려. 잡아줄게.”
난 순간 달빛에 비친 하청의 모습을 보고 클리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웃고 있는 모습이나 빛나는 머릿결을 삼키고 싶었다. 넓고 따뜻해 보이는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숨 막힐 정도로 껴안고 싶었다. 만약.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지금이라고.
두 눈 감고 뛰어내렸다. 포근한 팔이 등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무릎이 부딪혀 아팠지만 그냥 웃음만 나왔다. 난 하청 목을 팔로 감싸고 끌어안았다. 떫은 맥박이 느껴진다. 난 홀린 듯이 물었다.
“저랑 남은 버킷리스트 같이 채워요.”
“그러려면 나랑 만나야 하는데.”
“만나고 있잖아요 지금도.”
“그거 말고.”
하청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연애.”
난 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온 몸이 뜨거웠다.
하루만에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도저히 맥을 추릴 수가 없었다.
유일한 연예인이었던 하청을 만나고, 같이 야자를 빼고, 담을 넘어, 서로를 품에 안았다.
이건 연애하자는 무언의 표시일까?
만약 내가 느낀 것이 오롯이 사랑이라면 받아들이고 싶었다. 남자랑 남자랑 사랑한다는 게 남고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 심장이 하청을 보자마자 뛰었으니까.
생각 정리가 끝나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난 또다시 애매하게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저랑 연애해요”
하청은 놀란 티도 내지 않았다.
“그럼 지금 당장 하나 채워도 돼?”
“전 좋아요.”
“나 허락받은거다?”
고백을 받는 것도 하청답구나. 드라마에서 봤던 거랑은 다르게 꽤 양아치 기질이 있는 것도 같았다. 난 한결같이 장난스러운 그 멋들어진 얼굴을 바라보며, 어쩌면 하청이 진심으로 날 사랑할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청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그래, 버킷리스트에
애인이랑 키스하기 같은 것도 있었나 보지.
*
그 이후로는 뭐 연애 키스 데이트의 반복이었다. 잘생긴 복학생이 전학온지 하루만에 순실한 모범생을 꼬셨다는 말이 전교에 나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행복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버킷리스트는 놀랍게도 다 비슷한 느낌이었다. 볼링장 가기나 수원역 가기같은 소소한 것들이 주욱 늘어졌다. 번호는 정확히 백가지였는데 채워진 건 구십번까지였다. 왜 열개는 비어있냐 물으니 아직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남은 버킷리스트 모두 나와 함꼐 이뤄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첫 데이트, 그러니까 야자를 짼 그날 팬이었다는 걸 밝혔다. 덕분에 싸인을 받았지만 그 이후로 내 애칭은 줄곧 ‘팬’이 됐다. 솔직히 원하지 않은 애칭이었다. 자기나 여보 같은 건 오글거려서 못 듣는다지만 팬은 너무 공적인 사이 같다고 생각했다.
하청은 이유도 없이 며칠씩 학교에 빠졌다가 다시 며칠씩 나오곤 했다. 학교에 빠질 때는 내 연락도 읽질 않았는데, 화를 내면 헤어자자고 할 것 같아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부러 언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눈에 보일 때는 적잖이 속상했다.
오늘도 하청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열 시간 전에 보고 싶다고 보낸 문자에는 답이 없었다. 작은 설렘으로 시작했던 사랑은 어느새 날 갉아먹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야자가 끝나면 아홉시. 기분이 이상해서 동네를 몇 바퀴 돌고 오니 열 시가 넘었다. 난 조용히 작은 단칸반 속으로 몸을 숨긴다. 현관문을 열자 쩅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아빠다. 하청에게 받았던 싸인본을 들고 찢어질 것처럼 화난 표정으로 날 향해 다가온다.
맞는다.
하는 생각에 눈을 감았는데, 들려온 건 종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아직도 연예인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니?”
내 사랑이. 싸인이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맞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던 건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물었다. 될 대로 돼라 싶었다. 난 뒤 돌아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우습게도 생각나는 얼굴이 하청밖에 없었다.
번호 일번을 꾹 누르자 하청 하고 적힌 이름이 뜬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아 문자를 보냈다. 쓰고 싶은 글을 모두 쓰니 어느새 팔십자가 다 채워져 있었다. 문자를 보내고 다시 다음 문자를 보내려는데 알이 부족하다는 표시가 떴다. 되는 일도 없네.
차피 읽지도 않는 문자는 왜 보내서.
하청이 학교에 다시 온다면 그냥 잘못 보낸 거라고 둘러대야겠다고 생각화면서 배터리를 뺐다.
놀이터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눈물이 나왔다. 하청도 가족도 전부 싫었다. 그때 천천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난 미끄럼틀 아래에 숨어 추위에 떨다 그대로 잠에 들고 말았다.
……권하빈.
권하빈!
하청이 내 이름을 부르는 꿈을 꿨다.
비현실적이게도, 눈을 뜨니 홀딱 젖은 하청이 웃고 있었다.
“어떻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서는 그래도 웃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가증스러웠다. 그냥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 연락 안 봤어.”
“배터리 빼 놨어.”
일부러 까칠하게 말했다.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더 하청을 좋아하게 되면 그때는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매일 같은 하청의 미소가 그날따라 수척해보였던 건 내 착각이었음이라.
“술 사줄까? 형이.”
젖은 몸을 말리지도 않고 하청은 술을 병쨰로 들이켰다. 하청의 몸이 뜨거웠다 차가웠다를 반복했다. 하청은 내일이면 분명 지독한 독감에 걸려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키스도 포옹도 모든 스킨십도 가벼웠다. 하청은 세상을 탐하듯 내 얼굴을 만졌다.
하청은 항상 날 헷갈리게 한다.
세상에서 날 가장 사랑해주는 것 같기도, 언제는 어떤 감정조차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청은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마시다가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나도 많이 마셔서 잘 기억나는 건 없었지만
하청이 내게 “헤어지자"고 했던 건 분명했다.
[어디야] - 하청
[제발 전화 좀 받아] - 하청
[괜찮아?] - 하청
그러니까 다음 날 본 이 문자 목록들과,
하청이 그날 입고 있던 병원복은 이제 나랑 상관 없다는 뜻이었다.
*
하청은 그 이후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세 달이나.
연기를 하던 떄처럼 잊히는 건 금방이었다.
어쩌면 나도 공부라는 핑계로 그렇게 쉽게 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십이월 기말고사가 끝나고
지독한 열병에 걸려 병원에 찾아갔을 떄
나뭇가지처럼 마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독히도 눈에 자주 보이는 게 왠지 신경이 쓰였다. 그 사람은 곧 죽을 것처럼 진짜 아파 보였다. 왠지, 눈에 익은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사람이 날 피하는 것처럼 보여서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갑작스런 몸 상태 악화로 그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갈 떄에나 그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하 청.
하 청이었다.
그 앞에 앉아 멍하니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무려 세 시간이었다. 세 시간동안이나 수술하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의사가 나랑 하청의 관계를 묻길래 연인이라고 답했다.
내 마음대로 다시 사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버킷리스트, 아직 여러 개 남아 있었으니까.
하청은 제 몸 상태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
급성 백혈병이 열여덟에 발병. 스물하나까지 투병하다가 완치된 줄 알았으나 일 년 뒤 재발 사실이 발견됐다. 그것도 걷잡을 수 없도록 아주 커다란 암세포가. 시한부 일 년. 하청 운명에 그게 딱 붙었다.
하청은 그 자리에서 버킷리스트를 쓰고 병원을 나갔다. 남은 삶은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버킷리스트 때문에.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악화되기 전에 헤어질 기회가 왔을 땐 다행이었지.
죽은 사람 그리워하는 거 못 할 짓이니까.
난 일 년 안에 잊겠다는 약속으로 다시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분명 거짓말이었다.
*
새해는 금방 찾아왔다.
제야의 종이 울린다.
하청은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소원이었는데.”
“……뭐가?”
“새해 맞는 거.”
“…….”
다 갈라져가는 목소리로. 하 청은 한 글자 한 글자를 겨우 뱉어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세게 물었는데 입술 대신 가슴만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눈물은 가릴 수가 없다.
“21세기 한번 겪어 보는 거.”
“권하빈 성인된 거 보는 거.”
“…….”
“솔직히 못 이룰까 봐 좀 걱정했다.”
잘 못 먹어 비쩍 마른 얼굴로 하청이 픽, 웃었다.
“이제는 죄책감 없이 키스할 수 있겠다. 그치.”
언제는 죄책감 들었었나.
맨날 생각 없이 입술 갈겼으면서.
청은 키스할 힘도 없다는 듯이 내 손을 제 입술에 가져다댔다. 마른 입술 주름이 손등으로 섬세하게 느껴진다. 또 울 것 같았다.
이십세기에서 이십일세기 되는 거.
핵폭발이 일어날 거다 인터넷이 마비될 거다 말은 많았는데 변한 건 하나 없었다.
티비에서는 제야의 종이 울리고 내 손엔 하청 입술이.
새천년 찾아온다고 우리는 끝나지도 구원되지도 않는다.
이십일세기에는 세상을 바꿀 신기술이 당연하게 터져나올 줄 알았는데. 그래서 하청 병도 순식간에 고칠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그딴 거 없었다.
그냥 다를 바 없는 하루일 뿐이었다.
*
아침에 일어나니 하청이 혼자 아침밥을 떠 먹고 있었다.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애가 혼자 숟가락까지 들다니 놀라지 않을 일일 수 없었다. 난 기뻐하며 유승현과 이유석을 깨웠다. 하청은 의기양양했다. 이대로만 가면, 정말이지 병도 다 나을 수 있을 것처럼.
얼마 전 어두운 표정으로 건강이 좋아질 일은 없다고 말했던 의사들이 떠올랐다. 순 돌팔이였잖아. 하청은 죽지 않는다. 하청이라면 분명. 우리에겐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아침 열 시가 되자 부쩍 해가 뜨거워졌다.
“그럼 나 이제 소원 딱 하나 남았다. 백 번째.”
하청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색색댔다. 다만 그 눈만은 맑았다. 버킷리스트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겼었나. 우리를 만나게 해 주고, 웃게 해 주고, 또 울게 해 주고 끝내 사랑하게 해준 그 한 단어가. 하청은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아픈 주제에 다 낡아 헤진 버킷리스트 종이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우린 어떻게 해서든 그 마지막 소원을 꼭 이뤄주고 싶었다. 오늘따라 하청의 상태가 좋아 보였기 때문인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청은 결의에 넘친 표정이었다. 어쩌면 하청은 그 순간 제 운명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울지 않았다, 청은.
“집에 가야 할 수 있는 거야, 그건.”
마지막 소원인 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원 밖으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집은 그나마 가까운 편이니 다행이다.
버킷리스트를 완성하는 것이 하청에게 얼마나 큰 일인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고작 병원 벗어나는 것 하나가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럼에도 하청은 일 년을 바쳐가며 학교에서 생활했다. 그런 의지를 그냥 버려두긴 싫었다. 무엇보다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같은 하청이라면.
가장 먼저 말한 것은 이유석이었다.
“형. 타요. 나 면허 있어.”
고삼때 미리 면허를 따 둔 이유석이 선택이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청을 부축하고 천천히 차에 태웠다. 이 상태로 밖으로 나가겠냐고 화내는 간호사들을 겨우 뗴어내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집으로 향했다. 차로 이십 분 걸리는 거리. 고작 그정도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하청은 차에 탄 이후로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열이 들끓는다. 하청의 얼굴이 새빨갈게 붉어진다. 그건 타오른다기보다는 곧 식을 것 같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불안한 기분에 서둘러 열을 쟀더니 삼십구 도가 넘었다. 심각한 고열이었다.
“이유석…… 차 돌려.”
“돌리지 마.”
하청이 겨우 말한다. 한글자 한글자 온 힘을 다해서 겨우 말해야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온다.
“돌려!”
이유석이 브레이크를 밟자 하청이 다시.
“돌리지 마…….”
간절하게,
흉흉한 눈빛을 한 채.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이유석은 다시 악셀을 밟는다.
그래, 회광반조란 것이 있다고 한다.
하청은 지금 당장 병원으로 돌아가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이 뼈깊이 박혔다.
죽는다.
하청이.
그 두 단어는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일 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도 건강하던 하청은, 하늘처럼 커다랗게만 보였던 하청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집 앞으로 도착했다. 난 하청을 부축해 이 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문을 열자 하청은 내 손을 뿌리치고 무언갈 살피듯 주변을 둘러봤다. 뱡은 여전히 따스하고, 청의 향기가 맴돈다.
어느덧 삐쩍 마른 뒷모습이 천천히…… 천천히…… 어느 흰 꽃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성을 많이 들인 듯 탐스럽게 핀 꽃봉오리를 하청은 온 힘을 다해 꺾는다. 한 송이가, 그리고 또 한 송이가. 화분에 묻혔던 모든 꽃들이 손에 놓일 때까지 하청은 새빨간 얼굴로 줄기를 뜯기만 했다.
하청은 그 꽃을 전부 손에 쥐고 날 향해 걸어왔다. 꽃들 중에는 아직 다 피워나지 않은 것도 이미 시들어버린 것도 있었다. 하얀 꽃들로 이루어진 다발이 흐드러질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목끝까지 올라온 숨을 뱉을 수 없었다. 하청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게 웃곤 제 작은 품에 날 담았다.
그래.
난 이게 무슨 장면인지 알고 있어.
멋들어진 남자 주인공이 악당들을 모두 물리치고 괴롭힘 당하던 소년 앞에 서서 꽃 한 송이 건네주는.
“기적은 언제나 찾아오진 않아서 아주 먼 날에는 혼자 고난을 극복해야 될 날이 올지도 몰라.”
우습게도.
심장이.
“영웅은 한 사람만을 지켜줄 수는 없어. 그래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 때는 이 꽃을 보면서 날 떠올려봐. 히어로는 항상 모두의 마음 속에 존재하니까.”
그 말에 모든 힘을 쏟은 듯 하청은 곧바로 바닥에 쓰러진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는 등을 떠받치자 등 뒤로 척추가 고스란히 만져졌다. 가볍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그래서 곧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청의 손에 들렸던 하얀 은방울꽃이 허공에 흩어져 하늘하늘 쏟아졌다. 꽃이 휘날리고 서로 눈 마주치니 왠지 결혼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근데 왜 난 한 사람만 지키고 싶은 거냐…….”
청의 장난스런 한 마디에도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강한 얼굴을 하고 평소처럼 웃으면서 청은. 하청은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항상 남몰래 울던 청은 모든 소원을 이루고 나서야 울었다. 더는 그 무엇도 바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영웅 같은 거 안 할래.”
열이 오른다.
손에 닿은 피부가 뜨겁다.
하청이.
온 세상의 숨을 들이켰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
나를…… 잊지 마세요……
하청은 죽었다.
그 말이 꿈처럼 느껴졌다.
추신. 여기까지 읽은 분은 없으실 것 같지만 만약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정말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