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By Kxng
나는 밤 11시 47분, 다시 그 소리를 들었다.
거실 벽 뒤, 오래된 장롱 쪽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나는 조용히 TV 볼륨을 줄이고,
숨을 죽였다.
하지만 정적이 되려 너무 깔끔하다.
몇 초 후, 또다시.
딸깍.
이번엔 분명히 문 여는 소리다.
장롱은 열쇠가 있어야 열린다.
나는 그 열쇠를… 분명히 주방 서랍에 넣어뒀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일어나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장롱 앞에 섰을 때, 내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문을 열어보려 손잡이에 손을 얹자
갑자기, 문이 안쪽에서 밀리듯 활짝 열렸다.
나는 비명을 참았고,
그 순간 장롱 안에서 무언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 핏기 없는 눈.
그리고 속삭이는 소리.
"왜 열었어…? 아직… 나갈 시간이 아닌데…"
나는 얼어붙은 채 그 얼굴을 쳐다봤다.
입을 열고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매어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장롱 안에서 나온 손이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살갗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지만,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장롱 문은 다시 ‘철컥’ 하고 닫혔다.
정적.
오직 내 심장 소리만 집 안을 울렸다.
나는 천천히 기어가 장롱 문을 다시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존재도, 흔적도.
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냄새. 어릴 적 할머니 집 장롱에서 맡았던,
곰팡이와 오래된 피 냄새.
그리고 마룻바닥 밑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어지러운 머리로
경찰에 신고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장롱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어요”라는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우선, 그 장롱.
그건 집에 원래 있던 가구가 아니었다.
두 달 전 이사 왔을 때, 장롱은 이미 안방 벽에 붙어 있었다.
이상하긴 했지만,
빈티지한 느낌이라 맘에 들어 그냥 두었다.
그런데 그날 밤 이후,
장롱 문은 매일 밤 11시 47분에 ‘딸깍’ 소리를 냈다.
정확하게, 같은 시간.
나는 손전등과 스마트폰을 챙기고 장롱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바닥 안쪽에 작게 뚫린 틈 하나를 발견했다.
잘 보이지 않는 위치.
일반 조명으로는 절대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틈 사이에 낡은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꺼내 펼쳤다.
노란색 종이에 잉크가 번진 글씨.
-8월 4일, 내가 여기서 나간다.
누군가 반드시 다시 열게 되어 있어.-
바로 오늘 이였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장롱 앞에 섰다.
종이에 적힌 날짜 — 8월 4일, 오늘이었다.
무언가가 오늘 ‘나온다’고 했다.
누가 왜 그걸 적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검색을 시작했다.
주소, 이 집의 거래 이력, 주민 신고 내역.
대부분 깨끗했다. 너무 깨끗했다.
그러다 2011년의 한 블로그 게시물을 찾았다.
오래된 캡처, 번진 이미지 속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00동 주택 실종 사건.
고등학생 김유진(14세),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일주일 만에 실종.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방 안에서 장롱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었다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김유진.
그녀가 실종된 주소는,
바로 이 집이었다.
나는 다음 날 오전, 시청 기록 보관소로 갔다.
사람들 몰래 건축 허가 도면을 열람했다.
그 장롱이 붙은 벽 뒤엔…
원래 작은 창고방이 있었다.
하지만 2011년 이후 리모델링 도면에서 그 방은
삭제돼 있었다.
벽 안에 실제로 숨겨진 공간이 있는 거다.
나는 전기 드릴과 렌치, 작은 해머를 어디선가 빌려왔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밤 11시 30분.
나는 장롱을 밀어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뒤에 진짜 문이 있었다.
녹슨 철문, 잠금장치도 없는 채로, 마치…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 곰팡이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
“도와줘… 제발… 여기…”
나는 플래시를 비췄다.
벽면 가득한 손자국.
그리고 벽에 적힌 수많은 이름들.
맨 아래, 붉게 번진 글씨.
김유진
2011. 8. 4.
나가지 못했다.
플래시 불빛이 벽면을 훑었다.
어두운 방, 곰팡이 냄새 속에 울음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나는 다시 그 이름을 봤다.
김유진.
…그러고 보니...어디서 본 이름인데.
익숙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조여 왔다.
벽을 따라 적힌 다른 이름들을 더 살펴보려는 순간—
무언가가 내 뒷덜미를 덥석 잡았다.
“왜 이제야 왔어…?”
나는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다.
한 소녀가 거기 서 있었다.
피곤하고 창백한 얼굴, 헤어진 교복, 그리고 그 눈.
…그 눈을, 나는 알고 있었다.
“유진…?”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릴 적. 초등학교 2학년.
내 옆집에 이사 온 소녀. 항상 조용했지만, 눈빛이 강했던 아이.
김유진.
우리는 단짝이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유진은 갑자기 이사를 갔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너무 쉽게 잊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졌고, 이름조차 흐릿해졌다.
그게… 이 집이었던 거다.
“넌 왜 나를 잊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저 머리를 감쌌다.
기억이 너무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사진, 놀이터, 비 오는 날 우리가 나눴던 약속.
“절대 안 잊을게.”
그리고 마지막 기억.
그날, 우리 둘이 몰래 들어왔던 이 낡은 방.
그날 유진은 말했다.
“이 집에는 다른 문이 있어. 밤에만 열리는 진짜 문.”
나는 겁에 질려 도망쳤고,
그날 밤 이후 유진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지워버렸다.
아니, 지운 게 아니라 지워진 거였다.
이 집이 누군가의 기억을 먹는다.
여기에 갇힌 사람들의 이름은 지워지고, 세상은 그들을 잊는다.
그리고 매년, 8월 4일에만 문이 열린다.
유진은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기억한 사람… 네가 처음이야.”
“네가 날 기억해줘서… 이 문이 열린 거야.”
유진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작았지만,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감각이었다.
우리는 함께 장롱 너머로 다시 걸어나왔다.
그 순간, 숨겨진 공간의 공기가 흔들리며… 소리 없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벽이 무너졌고, 장롱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더 이상, 그 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8장 — 그 이후
경찰과 기자들은 내가 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한 환각”이라며 진단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김유진이 돌아왔다.
학교에선 그녀의 존재를 몰랐지만,
어디선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가 살아 움직였고, 그녀는 “잠시 실종되었다”는 기록으로 복귀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대학에 등록했고,
우리는 때때로 옛 추억을 꺼내며 웃었다.
아직도 그녀의 눈엔 가끔 그 방의 어둠이 남아 있지만,
그녀는 분명히 이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날 이후, 벽에 적힌 이름들을 전부 기억해두었다.
어른들은 말한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그런 아이는 처음 듣는다”고.
하지만 나는 잊지 않는다.
이름은 지워져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매년 8월 4일,
잊힌 이름들을 작은 노트에 한 줄씩 적는다.
김유진.
이하윤.
정우석.
…그리고 오늘.
내 이름도 적혔다.
By Kxng
작가 큐리어스
https://curious.quizby.me/kxng…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분명 연극부 소설로 돌아온다고 했는데ㅠㅠ 그거 조금 늦어질 것 같아요ㅠ
데이터가 다 날라가서ㅠ
죄송합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