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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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7 21:32•조회 76•댓글 0•천진
그녀만이 내게 선명한 탓에 그 외의 것은 전부 흐려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 말뜻은 마냥 그녀가 그립다고. 다른 마음이 없다···는 건 역시 거짓이겠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 웃고 그녀를 위해 울었으며, 그녀가 원한다면 기꺼이 망가질 수 있었다.

나는 갈망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자가 되길 자처했다.



그날 밤 그녀는 꽤 늦게 잠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하릴없이 하루를 더 머물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 조금 기뻤다. 마루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더 이상 우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관뒀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하현달이 떴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나. 달이 휘영청 밝았다. 우리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달이 참 곱다.
― 응. 곱다.

나는 마냥 그렇게 답했다.

그녀는 내 팔을 베고 대청마루에 누웠다. 나는 끝없이 인내했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 밤으로 긴 평생 동안 어김없이 그녀를 그리워하리라 확신했다. 여름밤은 찼다. 너무 어두워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에 검은 별이 빼곡했다. 나는 천천히 숨 쉬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내 뺨을 간질였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 나를 미워하지 마. 나지막이 속삭인다.

나의 사랑은 지독하게 가난하여서 사랑함에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다. 나의 유일하고도 약소한 愛情을 훔쳐 간 그녀는 과연 무슨 죄를 지었길래? 우리의 질긴 연줄이 끊어진대도 나는 놓지 않을 거야.



늦은 새벽부터는 비가 억세게 내렸다.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이 굵어질 때쯤 그녀가 잠에서 깰까 조심스레 건넌방으로 옮겼다. 잠에 들어서도 그녀는 연신 얕은 기침을 해댔다. 그녀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길어 보아야 오 년이었을 테지. 나는 마지막으로 입 맞추려다 그만두고 말았다.

― 조금만 더···.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행복해졌을까, 물으니 답을 할 사람은 역시 나뿐이었다. 모든 불행을 내 탓으로 돌려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완연하지 않은 작별은 나를 미워할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장마는 끈덕졌고 그녀의 班家를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좌절했다. 그녀를 위한 나의 사랑은 숨겨져야만 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녀에게 무뎌질 수 없다. 나는 이후 진척 없이 떠돌게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눈을 돌리는 곳곳마다 그녀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괴로웠으므로 도망쳐야 했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보인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로 나는 좁디좁은 이 지구 어디론가 숨어야 했다. 비가 내 전신을 적셨다. 이곳을 벗어나면 그녀가 떠오르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그녀는 내가 도망친 후 삼 년 뒤에 죽었다. 결국 마지막 일 년을 남겨두었을 때쯤 나는 바보같이 그녀의 곁을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고 맴돌았다. 그녀가 나를 눈치채주기를, 혹은 나를 찾아주길 바라며 담벼락 아래에 몸을 숨기고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나는 몸에 힘이 풀려 흙바닥에 몸져누웠다. 손톱으로 내내 살을 뜯어보지만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아··· 뜻을 달리할 수 없으니 온전히 가져가도 좋아.



나는 집의 낡은 욕조에서 그녀를 상기한다. 찬물에 반쯤 잠겨 축축한 옷과 추위를 느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노화를 멈춘 나의 몸뚱어리가 떠나간 것들을 놓아줄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 탓에 나는 이제 달구경이 어렵다. 한 켤레 구두가 눈물, 어쩌면 수돗물일지도 모르는 것으로 젖었다. 1994년 여름, 지구의 종말은 얼마나 남았는가. 그럼에도 내가 죽지 못한다면 우주의 멸망은 언제인가. 나는 억겁의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가······.

나의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정도의 지성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완벽한 작별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삶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생각을 거듭한다.

1977년 역시나 여름날이었고, 미국에서의 첫날, 캘리포니아주의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내 記憶 속 미국의 나의 모습은 언제나 젖거나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부서지는 바닷바람에 흩어지는 말소리들이 들리는 듯했다.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줘, 그녀가 했던 말이었던가. 나의 화답은 무엇이었나. 그럴게, 같은 말을 해줄 수도 있었겠다. 모두 거짓이 되었을 테지만 나는 그녀가 찰나라도 기뻐하길 바라는 마음이 항상 크다. 나는 나의 말소리가 파도에 묻혀 사라지기를 소망하며 못다 한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애도하는 마음으로 흐른 시간들 혹은 떠나간 모든 것들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나에게 닿았던 불안정한 감각들은 멀어져 간다. 그녀의 작은 입맞춤까지도. 분 손가락으로 마른 입술을 매만져 보고선 또다시 무릎 위로 마냥 고개를 묻어버린다. 낮은 체온이 얽히고설킨다.



저 멀리 거실에 틀어놓은 텔레비전의 소리가 아득히 들린다. 욕실은 적막하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옷이 다시금 물에 젖고 나는 욕조에 잠겨간다. 이어지는 여주인공의 대사. 무심코 귀를 막는다.

―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미국의 자두는 푸르다. 이곳은 그녀가 있던 곳과는 너무나 달라서 나는 모든 것을 그곳과 빗대어 본다. 대략 오백 년의 세월 동안 생긴 독특한 습관이다. 나는 요즈음 삶을 살아감의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석 달 전의 꿈에서 나는 연못에 돌을 던졌고 그녀는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크게 소리쳤다. 가라앉는 것이 나인지 돌멩이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다시 까무룩 잠에 든다.


■■■ 사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



욕조의 마개를 뺀다. 담겨있던 물은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간다.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로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마당으로 간다. 오랜 목욕을 마치고 물기는 닦지 않아 젖은 발로 잔디를 밟는다. 이 마당은 달리기에 너무 좁다. 날씨가 맑은 날에 나는 푸른 자두나무 아래에 앉는다. 물기는 뜨거운 잔디에 말라간다. 여름과 같은 날이지만, 또 밤이 아니지만 살갗에 달라붙은 셔츠는 차다.

감상에 젖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 잠시 눈을 붙인다. 언젠가는 잔뜩 부풀어 터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여름은 점점 뜨거워진다. 그러나 나의 서늘한 여름은 결코 변치 않는다. 그 순간부터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흐려져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몸속이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한다. 나는 최근부터 울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그녀를 한 번 더 상기한다. 뺨이 뜨거워지고 마침내 결론짓는다. 존재하는 樂園이 나의 손을 빠져나간다.

얕은 꿈속에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온전히 발음할 수 없다. 비― 도― 하고선 아무렇게나 주저앉아버린다. 숨이 가쁘다. 몸이 달아오르며 눈앞이 흐려진다. 피부가 물에 젖어 번들거린다.



꿈에서 깨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눈가를 문질러보지만 건조했고 갈라진 입술로는 그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힘이 빠진 전신을 일으키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일으킨 상체를 다시 자두나무에 기대고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에 귀를 기울인다. 밤바람이 머리를 헤집는다. 지워져 가는 낙원과.

― 미안해···.







졸음이 밀려온다. 오랜 불면이 떠나간다.



* 영화 러브 스토리 중 일부 대사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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