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4 20:00•조회 39•댓글 1•해윤
처음에는 그저 한 계절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한때는 분명 가까웠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시간 밖으로 조용히 밀려난 사람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함께 걷던 길이나 아무 의미 없이 웃던 밤 대수롭지 않게 나눴던 말들은 그저 지나간 기억이 되었고 나는 그것들이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사람들도 바뀌고 계절도 여러 번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이미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고 믿고 있었다. 더 이상 이어질 문장이 없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 버린 책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날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오래전에 닫아 두었다고 생각했던 문장이 누군가 조용히 책갈피를 끼워 둔 것처럼 다시 펼쳐졌다. 잊었다고 믿었던 장면들이 아주 사소한 순간에 되살아났다. 길을 걷다가 문득 스치는 공기의 냄새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웃음소리 같은 것들 속에서.
그때서야 알았다. 어떤 관계는 끝난 것이 아니라 그저 멀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마치 오래된 책이 책장 깊은 곳에 꽂혀 있다가도 어느 날 우연히 다시 손에 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서로의 시간에서 멀어졌고 예전처럼 같은 길을 걷지는 않겠지만 그 시절의 우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기억들은 여전히 조용히 남아 때때로 마음의 한 페이지를 다시 넘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정말로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