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더러워라. 사생 주제에 내게 손을 대다니."

사생아의 신분으로 잔인한 황실에 던져진 7황녀, 은색 머리에 회색눈을 가져 금발 적안을 가진 황제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황제가 그녀를 황족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오직 그 여자 때문이니라.

"저 황녀예요. 사생아라더니, 폐하와 정말 안 닮았네요."

그녀는 사교에서 배척받으며, 언제 죽을까 고민하는 신세에 놓여있었다. 마침 험한 북부로 시집을 간다 하니 그때 확 죽어버릴까. 하는 바르지 못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벨, 허튼짓 말고 새신부로써 본분을 다하거라."

황제의 냉정한 눈빛 아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삶의 의지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팔려가는 것에도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

"그 년이 대공과 약혼만 무사히 마치면.. 하하하!!"

엿듣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황제의 집무실에서 세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와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시집보내는 것이 만족스러운지 황후의 얇은 웃음소리 또한 황제의 굵은 웃음소리와 섞여 들렸다.

"그런데, 그 아이. 요즘 독살 시도가 늘었더군요."

황후의 한마디에 집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황제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황후의 손을 잡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책을 생각해 내라는 일종의 경고와 같았다.

"..죽더라도 약혼은 하고 죽어야 할 텐데."

"그러게요. 주변에 사용인이라도 더 붙여야겠어요."

그녀는 약혼에도, 삶에도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지만 이 대화가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지 없는 삶에 일과란 침대에 누워있고 가끔 강제로 연회에 끌려나가는 것이 다였는데, 사용인이 붙으면 귀찮아진다는 것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독살 시도가 늘었다고... 찾았다.'

—

"황녀님, 이거 마셔보시겠어요?"

나름의 예의를 차린 시녀의 말에서 은근한 무시가 느껴졌다. 시녀의 그윽한 시선에 얼마 전 황후가 붙인 시음 시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먼저 마셔보겠습니다. 주시죠."

시음 시녀가 잔을 입에 대자마자 발작하며 쓰러졌다. 뻔했다. 잔에 독이 묻어있었겠지. 독 묻은 잔을 건넸던 시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순식간에 자리를 피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설명해, 사벨."

큰 소란에 놀란 황제가 그녀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독이 묻어있다는 이유로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아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유리조각이 그녀의 입가에 닿았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차가워졌지만, 희미한 의식 속 절규하는 황제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생에 유일한 행복을 느꼈다.

# 은방울꽃이 지고, 새롭게 피어났다.
꽃말 : 희망,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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