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2 14:13•조회 55•댓글 2•여우비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 네 생각이 났다. 그 후로 너는 태도가 조금 변했다. 늘 먼저 이상한 질문을 해대던 네가 조용했다. 그렇듯 나와 함께 밥을 먹고 학원을 가고 집을 바래다 주었지만 전과는 달랐다. 네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일도 드물어졌다. 나는 그저 무언가 일이 있었구나, 여기기로 했다.
“여름아, 나 오늘 먼저 갈게.”
“어? 아, 응.”
그러더니 너는 가버렸다. 교실엔 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생각해보니 너는 나를 여름이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다. 주로 바로 자신의 본론을 이야기 하거나 질문을 했다.
학원에서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계속 무엇인가 놓친 것처럼 찝찝했다. 뭘까. 그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어쨌거나 집에 도착했다.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 게임을 했다. 게임을 하면 잡생각이 덜 난다. 힘껏 키보드를 두드렸다. 결과가 좋지 않았다. 몸의 힘이 쭉 빠져 침대에 털썩 누웠다.
“좋아해.”
정적이 내려 앉았다. 나는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아이들로 둘러 쌓여 누가 누구에게 고백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여자 아이의 목소리였다. 상대편에선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애들은 꺅꺅대고 남자애들은 고백을 받은 아이를 탁탁 치며 요이거렸다. 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미안. 나는 연애 생각이 없어.”
쿵.
그대로 가방을 떨어뜨렸다. 누가 내 머리통을 내려친 듯 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매년 지겹도록 나와 붙어 다녔던 목소리. 너였다. 네가 고백을 받은 아이였다. 그 뒤로 고백을 한 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여자애들은 그 애를 다독이고 남자애들은 재미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이 무슨 해괴한 장면인가. 아니지, 해괴하진 않다. 뒤늦게 날 발견한 뒷자리 아이가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내 자리를 찾았다.
수업 시간에 딴 생각을 했다. 네가 고백을 받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의 친구는 오로지 나뿐이였다. 다른 아이는, 다른 친구를 사귀는 너는 상상되지 않았다. 너는 늘 한결같이 내 옆에 있을 것 같았기에, 우리가 떨어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쉬는 시간에 오랜만에 네가 말을 걸어왔다.
“야. 너 바다 가본 적 있어?”
네가 바다라고 하니 왠지 우스웠다. 속으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방금 전까진 머리가 하얬는데 네가 말을 걸자마자 생각이 텅 사라졌다.
“어릴 때 몇 번 정도. 넌 가봤냐?”
“아니. 겨울에 가는 바다는 어떨 것 같애?”
“더럽게 춥겠지. 바다도 꽝꽝 얼 정도로.”
“푸흐흐. 그치? 아무래도 그렇겠지?”
해맑게 웃는 너를 보며 묘했다. 네가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나는 웃는 너를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언제든지 네가 생각나면 꺼내 볼 수 있게.
“그건 왜 물어보는데?”
“그냥. 궁금해서.”
넌 항상 이렇다. 그냥.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알던 너로 돌아온 것 같아서 기뻤다.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그냥 웃었다. 웃는 널 따라 웃었다.
문득 다시 생각났다.
“너 아까 뭐야?”
“뭐가?”
“고백 받았잖아.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 그거?”
네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역시, 아직도 너에겐 나 밖에 없구나.
*
눈이 내렸다. 학교 운동장과 담장, 건물 지붕 위에 소복히 쌓였다. 아이들은 신나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진도를 미리 빼둔 덕에 선생님의 대부분이 눈놀이 하는 걸 허락하셨다. 들뜬 마음으로 신발을 갈아 신었다. 눈을 밟으면 뽀득거리는 소리가 난다. 어떤 아이들은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어떤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사진을 찍었다. 나는 눈으로 너를 찾았다. 너는 구석진 벤치에 앉아 벌건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뽀득뽀득뽀득.
너에게 다가가자 너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네 옆에 앉았다.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신발 끝만 쳐다봤다.
“눈 왔네.”
내가 말했다.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네 눈을 바라보았다. 너도 내 눈을 바라보았다. 네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너도 아마 똑같은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그렇게 눈을 응시했다. 너는 눈을 휘며 웃었다. 완전히 사라진 네 눈 때문에 더 이상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입꼬리를 당겨 웃어보였다. 벌떡 일어나서 쪼그려 앉아 눈을 둥글게 뭉쳤다. 너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나는 아아주 작게 눈사람을 만들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예쁘네.”
너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눈사람을 말하는 건지 나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사실 좋았다—. 추워서 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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