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따라 흐르는 흐릿한 시간. 방 안의 공기는 옅은 먼지와 말라버린 라일락 향을 품고 있었다. 창밖은 무채색의 풍경이었고, 빛은 유리창을 통과하며 미지근하게 식었다. 그것은 빛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잔상에 가까웠다.
손가락 끝에 닿는 나무 테이블의 감촉은 수백 년 전 멈춘 듯 건조했다. 그 감촉이 주는 유일한 정보는 고요였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테이블 모서리에 놓인 유리컵에 비친 바깥세상의 왜곡된 그림자뿐. 그림자는 무심하게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반복.
귓가에는 얇고 덧없는 소리가 맴돌았다. 오래전에 잊힌 멜로디의 흐느낌 같기도 하고, 혹은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독백 같기도 했다. 소리는 실체를 갖지 못하고 공기 중에서 부서졌다. 그 부서진 조각들은 다시 모여 하나의 투명한 감정이 되었다.
그 감정은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슬픔도, 기쁨도, 기다림도 아니었다. 단지, 존재했음이라는 희미한 확인이었다.
컵에 담긴 물은 흔들림이 없었다. 물 표면은 완벽한 거울이 되어, 바라보는 이의 표정 없는 얼굴을 돌려주었다. 그 얼굴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모든 것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된 서랍을 열었을 때 나는 텅 빈 공간과 마주했다. 공간의 냄새는 어떤 추억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깨끗한 망각의 냄새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닫았다.
세계는 미동 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고, 나는 그 안에 담긴 하나의 창백한 얼룩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러나 시작도 없었던 푸른 꿈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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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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