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8 16:22•조회 11•댓글 0•EIEI 🫶
동네 끝 골목,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
문이 반쯤 열린 작은 책방이 있다.
간판도 없고,
불도 희미하고,
시간이 한 번도 흐르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이 조용히 멈춰 있다.
그리고 그 안엔
한 사람이 있다.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그는 말이 없다.
다만, 찾아오는 이에게
가장 잊고 있던 기억 한 장을
책처럼 건네준다.
어느 흐린 오후,
소녀 하나가 책방을 찾아왔다.
“이곳이, 꿈을 찾을 수 있는 곳인가요?”
소녀가 물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가,
곧 오래된 양장본 하나를 꺼내 들고 돌아왔다.
표지엔 아무 글도 없었고,
손에 쥐자
조용히 종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소녀는 책을 펼쳤다.
첫 장엔
아주 어릴 적 엄마가 들려주던 자장가가 적혀 있었다.
다음 장엔
잃어버린 고양이의 이름,
그리고
초여름 저녁,
아빠 손을 잡고 뛰어가던 골목의 바람 냄새가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소녀는 조금씩 울었다.
기억은 아프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리웠다.
마지막 장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이미 모든 걸 가지고 있어요.”
소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책방도, 은행나무도,
모든 게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날 이후,
그 소녀는
세상의 모든 오래된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잊고 있던 감정들이
다시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
소녀는 작은 책방을 열었다.
간판은 없고,
불은 희미하고,
시간은 조용히 흐르지 않는 곳.
그녀도 이제,
말없이 책을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 필요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
언젠가 다시 찾아올 거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