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雨]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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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2 17:08조회 96댓글 2양천리
─ 그친 뒤에도 남아 있는 비, 지나간 청춘과 감정의 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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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저녁, 그는 오래된 역 앞에 서 있었다. 역은 더 이상 기차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처럼 낡아 있었고, 플랫폼에는 잡초가 자라 철로를 가볍게 덮고 있었다. 한때 수많은 이별과 시작을 삼켜왔을 그곳은, 이제 한 사람의 기억만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청춘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청춘이라고 믿었던 시간들을.

청춘은 언제나 사랑과 함께 온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의 청춘은 사랑을 알아보기 전에 이미 달아나 버렸다. 너무 빠르게, 너무 소란스럽게. 그는 젊었다. 젊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라 믿었고, 낭만이란 단어를 손에 쥔 채 함부로 휘둘렀다. 밤새도록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말했고, 새벽녘에는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써 내려갔다. 그 시들 속에는 늘 어떤 얼굴이 있었지만, 이름은 없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다. 버스가 늦게 오던 오후, 그는 이어폰을 한쪽만 낀 채 서 있었고,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바람에 책장이 넘어가며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그는 알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낭만’이라 부르던 것들이 사실은 예행연습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말수가 적었고, 웃을 때면 세상을 조금 느리게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시간은 늘 한 박자 늦춰졌고, 그 덕분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거창한 고백도, 운명적인 약속도 없었다. 다만 함께 걷고,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침묵을 견디는 일들이 쌓여 갔다. 그는 그녀 앞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청춘의 무모함을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고, 상처를 자랑처럼 늘어놓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는 불안해졌다.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적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꿈은 많았지만 형태가 없었고, 미래에 대한 확신은 늘 술잔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결국 그는 도망쳤다. 구원받기 전에, 먼저 무너지는 쪽을 택했다. 사랑은 그에게 너무 밝았고, 그는 여전히 어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별의 말은 서툴렀고, 변명은 진심보다 앞섰다. 그녀는 붙잡지 않았다. 그 침묵이 그를 가장 아프게 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여러 도시를 옮겨 다녔고, 여러 얼굴을 스쳐 보냈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관계들, 청춘의 잔해처럼 흩어진 시간들. 그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 법을 배웠다.

세월은 공평하게 그를 지나쳤다. 청춘은 끝났고, 낭만은 광고 문구처럼 닳아버렸다. 어느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평생 찾고 있던 구원은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는 순간이 아니라, 끝내 외면하지 못한 기억 속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그 역으로 돌아온 것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플랫폼은 변함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래 서 있었다. 돌아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듯,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떠올리며. 그때 문득,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사랑은 실패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 청춘은 끝났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 낭만은 허상이었지만, 그 허상을 믿었던 순간들이 삶을 버티게 했다는 사실.

구원은 기적처럼 오지 않았다. 다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용서했다. 그가 사랑을 두려워했던 이유, 청춘을 낭비했던 이유, 낭만에 집착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완전한 치유는 아니었지만, 다시 걸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은 주었다.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내려왔다. 그는 역을 떠나며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은 한 사람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한때 진심이었던 자신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청춘은 지나갔지만, 그 안에서 배운 슬픔과 용기는 아직 남아 있다고. 그리고 구원은 결국, 다시 살아가기로 선택하는 아주 조용한 결심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낭만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사랑을 과장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오늘 하루를 살아낼 만큼의 온기를 가슴에 품은 채. 그렇게 그의 삶은, 소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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