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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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3 19:20조회 64댓글 10아련한
물속을 천천히 가르는 고래의 움직임은, 마치 태초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거대한 몸체가 파도를 가르며 나아갈 때마다, 물은 묵직한 존중처럼 갈라졌다가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래의 등 위로 햇살이 부서지면, 짙은 회색 피부 위에 무언가 오래된 신화의 문장을 닮은 금빛 결이 번져 흘렀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 찰나 고래는 무언가를 견디고 이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를 품고 있었다. 공기와 물의 경계에서 터지는 숨결은 세상에 대한 짧은 인사 같았고, 곧바로 다시 잠기는 그 모습은 아주 오래전, 우리도 잊어버린 무엇을 간직한 채 흘러가는 듯했다. 고래는 말이 없었고, 속도도 없었지만,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긴 문장이었다. 이해받으려 하지 않고, 단지 흐르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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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조각글입니다 - ! 피드백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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