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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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2 00:21조회 54댓글 1세리아
“목을 쳐라!”

왕이 경을 치자 대검이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올랐다. 전하께서는 그 창백한 얼굴로 소리 내 웃으셨다. 내 죽음이 그렇게까지 즐거운 일이라는 듯.

연모한다 속삭였던 지난 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유명할 정도로 반반한 얼굴을 가져 반쯤 강제적으로 궁에 들어오게 된 게 고작 오세 되던 해였다.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살아가다, 열여섯 살이 되어 성종대왕의 장자 이융 대군께서 임금으로 책봉되신 뒤 운 좋게도 하룻밤 승은을 받아 후궁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 이후, 거의 매일 밤 전하께선 날 처소에 부르셨다.

“전하!!!”

목이 나가도록 소리쳤다. 눈물이 목끝까지 타올라 터질 것처럼 흘렀다. 날 바라보는 전하의 눈에는 그 어떤 연정(戀情)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날부터인가, 난 전하의 처소에 불려가지 않게 되었다. 간간히 뵌 전하는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미쳐서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 사화(士禍)를 도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몇몇 사림인들은 소리소문없이 죽어나가고 있는 실태였다.

홍치 11년 무오년 7월 상순에 일어난 무오사화로 흩어진 민심이 아직 회복되지조차 않았는데!

심지어는 막 자라는 진성대군께서 전하와 비교해 더 성품이 온화하고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 다른 사화가 발생하면, 반정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피 흘리며 죽어가는 전하의 모습을 떠올리니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난 신하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려는 전하를 말리다 사형 선고를 받았다.

“소첩이 감히 전하께 아뢰오니, 지나친 분노와 폭정은 나라의 근심이 될까 염려되옵니다!”

칼을 든 신하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린다. 그 손에 들린 칼이 덜덜 떨리다 쟁그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하께서는 그 모습에 분개하셨다.

“무슨 까닭으로 아직도 사형 집행이 늦춰지는가! 즉시 칼을 들어 죄인을 단죄하라!”

난 더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전하께선 지나친 복수심으로 전하 스스로 깊은 고립과 외로움을 불러들이고 계시옵니다. 페비 윤씨의 죽음으로 이미 많은 피가 흘렀사옵니다! 언젠가 이 핏물이 전하께 닿을까, 소첩, 두렵사옵니다!”

그 말에, 인상이 가득했던 전하의 용안이 잠시 폈다. 그 분께서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 미소는 마치 잘 갈린 단도 같았다. 전하는 작은 칼 하나를 들고 모든 이와 맞서고 있었다. 등 뒤엔,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시체, 폐비 윤씨를 둔 채. 그렇게 연모했던, 살아있는 난 잊은 채…….

“네가 아직도 내 첩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심장에 비수가 꽂혀 박힌다. 그 연(戀)을, 흔적도 없이 잊을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난 어느샌가, 어쩌면 다섯 살 먼치에서 전하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부터,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온 연을 도저히,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전하를 마주 바라보며ㅡ 독기 가득한 눈으로 가장 크게 소리쳤다.

“연모합니다, 연모합니다 전하!”

주변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전하는 드높은 곳에서, 내 얄팍한 사랑이 그저 우습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난 어째선지 그 미소를 보며 전하가 한없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목 위로 대검이 올린 나보다 그 분이 더 위태로워 보였기에. 그 연민과 함께, 난 비단 같은 전하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었다.

“같잖은 순애구나. 그러나 네 사랑따위 원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태양이 맑은 대검에 비쳐 반짝 빛났다. 난 신하들과 후궁, 그리고 이름 모를 궁녀들에 둘러싸여 무릎 꿇고 있었다. 모래바닥에 쓸리는 무릎이 아프다.

……목이 잘릴 때 어떤 기분인지 내심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시야가 거꾸로 뒤집히며, 생전 거울로밖에 본 적 없던 내 몸이 보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녀린 몸은 맥도 추리지 못하고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두 눈에 하늘만 보였다. 그 시야도 왠지 점점 옅어지는 것 같은 느낌. 어디선가 누군가의 통곡 소리가 들리고, 머리맡으로 따뜻한 핏물이 느껴진다.

모든 학살이 여기서 끝이면 얼마나 좋으련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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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0월

임금의 실정보다 권세를 아래에서 쥐고 농락하는 것이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 하다
홍귀달 등과 무오년에 관계된 자들을 연좌시켜 바다 밖에 나누어 두도록 하게 하다
금표를 범한 사람들의 성명을 개록하게 하고, 이극균의 족친들을 고문하게 하다
죄인의 자손이 익명 투서를 할 염려가 있다 하여 빠짐없이 고문하게 하다
무오년 붕당의 폐단이 많다 하여 연좌하여 잡아들이고, 이원 등도 잡아들이게 하다
무오년 죄인의 아비 및 형제를 모두 외방으로 내보내라 전교하다
선전관들이 행행할 때 어마를 범한 자들에게 사형은 감하게 하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9월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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