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30 11:26•조회 22•댓글 0•여우비
시간은 빠르게 흘러 방학이 시작되었다. 지루한 식 끝에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했다. 방학식날 너는 결석을 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몸 튼튼하게 학교에 다녔던 녀석이 병결이라니. 꾀병인지 의심까지 들었다. 꽤나 싱기된 마음을 굳게 누르고는 너의 집을 찾았다. 나와 조금 떨어진 빌라에 사는 너는 종종 나를 바래다주고 집에 가곤 했다.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으며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곳인지 출입문은 열려 있었고, 엘리베이터 하나 없이 밝은 베이지색 계단이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너의 집은 3층. 빠른 걸음으로 발을 놀렸다. 담임은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으니 짐을 최대한 빨리 빼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아이들이 아니었다. 어깨에 진 가방에 온갖 물건을 쓸어담아 왔더니 삭신이 쑤셨다.
겨우겨우 도달한 301호는 예상대로 굳게 잠겨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숨바꼭질을 했던 그날 이후로 너는 묘연하게 나를 피했다. 어쩌다 마주쳐도 손인사만 대충 했으며 먼저 다가오지도 않았다. 내가 너의 쪽으로 다가가려 하면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짜증이 나고 내가 뭔가 잘못했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철컥.
이런저런 생각이 담긴 사이 문이 열렸다. 아주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네가 보였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한층 수척해지고 몸은 빼빼 말라 뼈만 앙상했다. 원래도 너는 체중이 적은 편이였으나 전보다 훨씬 더 심해 보였다.
“웬 일이야.”
“……괜찮냐?”
“허. 괜찮고 말고.”
“들어가도 돼?”
너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더니 들어오라는 표시로 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근처에서 사온 따끈따끈한 죽 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 놀았다. 너의 집은 늘 한결같았다. 내 집보다는 조금 좁고, 나무로 된 바닥과 문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의 형편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였다. 익숙한 주방을 지나 너의 방으로 들어왔다. 너는 날 이끌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앉았다. 워낙 푹식한 침대 탓에 네가 앉은 자리가 푹하고 꺼졌다.
“많이 아프냐?”
“됐어.”
“…….”
“별로 안 아파. 왜 왔냐?”
나는 손을 살짝 저으며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추워서 그런 건지 너는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있었다. 뼈가 안상하게 튀어나온 발등이 눈에 띄었다.
“허, 안 아프기는. 문병 왔다 문병.”
“진짜 안 아파.”
“그럼 꾀병이란 소리네? 학교엔 왜 안 나왔냐?”
“…….”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온도계를 가져와 너의 열을 측정했다. 37.1도. 나는 물에 얼음을 넣고 손수건을 적셨다. 곱게 접어 누워 있는 네 이마 위에 살포시 올렸다.
“능숙하네?”
아무 말 없이 누워 있던 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예전에 하윤이 아플 때 내가 간호 전담했었거든.”
하윤이 생각났는지 너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윤은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던 한 살 어린 여자아이였다. 같은 아파트에 같은 층이라 하윤과 나, 너는 함께 자주 놀곤 했다. 하윤은 우리보다 어렸지만 어른스러웠고 똑부러졌다. 나는 그런 하윤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하윤은 아팠다, 무지하게. 열이 펄펄 끓어 의식을 놓는 날도 파다했고, 자꾸만 기침을 해댔다. 그 여린 체구가 그만큼 버텨준 것도 사실상 기적이었다. 그때 나는 하윤을 간호했다. 여름방학 기간이였기에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방학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하윤의 집으로 달려갔다. 어린 마음에 하윤을 자신의 친동생 보듯 여겼었다. 외로웠고, 네가 여기 없었다.
너는 하윤이 아프기 몇 달 전쯤 유학을 갔다. 너의 부모님은 학업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분들이셨다. 네가 조금만 공부를 못해도 꾸짖으셨으며 가끔 매를 드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네 집을 꺼려했던 것도 있다. 나와 있으면 너의 부모님은 나와 너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저울질하셨다. 내가 너보다 성적이 아주 약간 더 좋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나를 치켜세우셨지만 그 말을 들으며 암울해하는 너를 보는 게 나는 너무나도 괴로웠다. 결국 너의 부모님께선 유학이라는 결정을 내리셨다. 없는 돈 긁어 모아 보낸 유학이었다. 당연히 소심했던 너는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 내게 전화를 걸었고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귀국했다.
“하윤이 잘 있겠지?”
“당연하지. 누가 돌본 하윤인데.”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야? 허.”
우리는 잠시 웃었다. 하윤이와는 좋은 기억이 훨씬 더 많았다.
하윤의 병이 점점 가라앉아 나는 안심했다. 귀국한 너도 하윤의 소식을 듣고 다행스러워 했다. 문제는 그 안심이었다. 하윤은 모든 잔병치레를 씩씩하게 이겨내었다. 오히려 나보다 훨씬 씩씩하게 버텨주었다. 그런데 깨끗이 나은 지 얼마 후, 너무나 허무하게도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멀리서 달려오던 오토바이를 보지 못하고 길을 가다가 그대로 부딪혔다. 그때 하윤의 부모님은 오열했다. 땅을 치고 울면서 하윤의 인형을 끌어안았다. 흐르는 눈물은 손으로 문질러 닦아도 곧장 사라지지 않았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푹 쉬라는 의미로 이불을 턱까지 당겨 덮어 주었다. 너는 턱 밑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며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치, 울고 그러냐.”
“뭐래. 내가 언제 울었다고?”
“…….”
“에이 씨, 빨리 가기나 해.”
너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볼멘 소리를 뱉었다. 나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 한 켠에는 나무로 된 낡은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곳으로 다가갔다. 액자가 많았다.
어린 네가 너의 부모님에게 안겨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나와 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진, 초등학교 졸업 사진, 중학교 졸업 사진까지. 옛 추억에 잠겨 그것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너는 어느새 방 밖으로 나와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너를 곁눈질했다. 너도 너를 스윽 쳐다보았다. 우린 그렇게 몇 분 동안 웃었다. 시간은 간사하게도 속절없이 흐르고, 우리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간다. 나는 이 시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은데, 허락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니까 너 되게 병신같이 찍혔네.”
“뭐래, 네 얼굴이나 똑바로 보고 말해.”
“어이가 없네. 누군 뭐 잘생긴 줄 아냐?”
“적어도 너보단 내가 낫지.”
우리는 티격태격 내가 낫네 너는 못생겼네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그게 웃겨서 서로를 응시하며 한참을 웃었다. 휘어지는 네 눈을 보고 있자니 새삼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빠르게 속절없이 흘러버리는 시간이니, 소중한 사람들에겐 더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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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윤이는 제 동생을 쏙 빼닮은 아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