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질퍽열병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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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1 19:33조회 134댓글 14유건
머리가 울려. 바닥에 투명한 액체가 질질 흘러. 그 사이로 섞인 붉은 피가, 너무 아름답게 번져. 어질하게 시야가 흔들려 발을 헛디뎠다. 쿵. 바닥에 흘린 액체가 내 옷에 스며든다. 찝찝해.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우여곡절 집으로 돌아왔다. 다 같이 무대 사전 조사를 하러 갔다나? 아니 나를 왜 잊어버리냐고. 개새끼는 뭐 화장실을 갔다 출발한다고 잊었다나 뭐라나 하는데 의도적으로 밖에 안 보인다. 그래도 덕분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일찍 귀가했다. 비록 나는 집에 빨리 돌아온 것을 후회했지만.

현관과 가까운 누나 방에서 누나가 자고 있었다. 지금 3시인데 아직 잔다고? 미쳤네. 내 방으로 기어가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아버지를 마주친 것이다. 아버지는 부엌에 수십 개가 전시된 와인 중 하나를 집어 따르고 있었다. 분명 좋지 못한 신호인데 나는 방으로 향하지 못했다.

누나가 자고 있는데. 내가 멍하게 서 있는 동안 아버지는 이미 몇 잔을 걸친 듯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 몸이 멈추고, 머리가 멈췄다. 눈앞이 새하얘져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내가 마주한 건 머리 위로 높이 들린 적색 와인병 하나. 그리고

쨍그랑―

머리를 부여잡고 눈앞에 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큰 소리에 깨서 나온 누나를 보았다. 손에 질퍽한 피가 느껴진다. 질퍽질퍽질퍽. 여름에 흐른 땀보다, 너를 사랑한 나보다, 더 질퍽해서 죽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없었고 이 상황을 온전히 마주하며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병실에는 누나와 개새끼가 있었다. 어이없어. 나는 너한테 이런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 거야? 나는 왜? 내 눈에 담은 너는 그 자체로 빛이 났는데. 너는 환하게 빛이 나는데. 드문드문이 아니라 가득 채워서. 밀려오는 생각에 나는 눈을 가렸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턱.

- 야 너 이대로 괜찮냐?

내 손목을 쥔 개새끼가 떨었다. 동공도, 손도 떨리는 꼴이 영락없이 겁먹은 강아지였다. 흉터가 진 눈을 지키려고? 개새끼가 한 질문에 원초적인 의문이 들었다.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내가 아버지를 벗어나면 다음은 어떡하라고. 이렇게 아파도 도망칠 수 없는 게 나한테는 두 개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버리라고 하니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러다 다시 확 죽어버리려 하면 네가 살려 줄거야? 그날처럼.


질퍽질퍽열병


고작 중학교 2학년, 우리 부모님은 아혼하셨다. 순전히 아버지 때문은 아니었다. 교묘하게 짜고 친 판에 아버지의 사업이 위기에 놓였고 어머니는 그것을 빌미로 이혼을 요구하셨다. 아버지는 순응했고 둘은 그 자리에서 이혼을 결정하셨다. 이제 아버지를 나 홀로 감당해야 했다.

누나는 뼈가 약해 조금만 강하게 맞아도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갔다. 팔이나 다리면 다행이지, 갈비뼈처럼 생명이 달린 뼈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누나를 걱정했고 모든 주먹질은 나에게 향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이여서 그랬을까. 나는 누나가 잘못한 상황에도 무작정 막고 보았다. 내가 막아보려 해도 누나가 온전히 무사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막았다. 그러다 입술이 찢어진 어느 날 처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냥 무작정 우리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가 미쳤지. 찬 바람 맞으면 정신이 좀 들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간 것이었다. 사실 잊어버렸다. 내가 그때 얼마나 절박하게 죽고 싶었는지 나조차 잊었다. 옥상에서 내려다 본 그 길에 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새끼가 날 살렸다 할 수 있을까. 개새끼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뿐이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너 때문에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살았어. 고작 너라는 의미 하나 때문에. 그래서 더욱 너는 알아선 안된다. 내가 그곳에서 뛰어내려가 너를 끌어안으려 한 것도 너는 절대 알아선 안된다.

너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네가 그때 있었다면 달랐을까? 너가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내가 널 찾았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래서 널 끌어 안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땠을까. 니가 없는 그 빈자릴 따라, 이 순간에도 난 너에게 가는 꿈을 꿔. 난 또 멍청하게 널 사랑했으니까. 네 흔적을 따라 매일 타올라. 내 마음이 널 그리워해. 아니 그립다 못해 아파해.

너는 나를 살리지 않았다. 내가 제멋대로 살았기에. 나의 죽음의 부정은 결국 네가 아니라 나였다. 감히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널 보고 살아버린 난 죽어도 너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네가 사라진 거리에는 냉기만 남았다.

이제야 얇고 흰 면 하나가 내 몸을 감싸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널널하게 걸친 티 사이사이 구멍으로 겨울의 한기가 몰아쳤다. 회색 반바지 아래로 볼품없이 드러난 희고 멍 든 다리가 초라해서 제정신이 들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면 안된다.


병실은 시원했다. 내가 망상과 회상 사이에 빠져 헤엄칠 동안 개새끼는 묵묵히 날 기다려 주었다. 조금 진정한 모습이라 괜히 안심이 되었다. 하긴, 친구가 피에 절여졌는데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개새끼라도.

- 나 어떻게 살았지?

- 언니가 나한테 전화하셨어.

- 아···.
- 고맙다.

너랑 나눌 수 있는 건 버석한 대화가 전부였다. 누나는 왜 119가 아니라 너에게 전화를 했을까. 아버지는 왜 오늘 취했을까. 너는 내 집으로 달려왔을까. 너는 내 모습을 보았을까. 3년 전에도 우연히 들키지 않은 내 추한 모습을

너는 결국 봤을까.


https://curious.quizby.me/ugun…

^ 퇴고 없어요 순애비례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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