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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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1 15:32조회 50댓글 1해월
세월은 빨랐으나, 나의 시계는 멈춰 있었다. 나는 스스로 몽상각이라 명명한 오래된 서재의 창가에 앉았다. 고립된 공간이었다. 창밖의 시간은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내 안의 모든 것은 멈춘 채 머나먼 인영, 너의 부재만을 응시했다. 네 자취만을 곱씹는 나의 사계의 몽상은 물거품처럼 증식되버렸다. 추억을 되감을 때마다 수많은 공백이 덧대어져 투명한 거품을 만들었고, 나는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애써 붙잡으려 한 것은, 결국 더욱 선명하게 사라져가는 것들뿐이었다.

봄의 생명력도, 여름의 열기도, 가을의 풍요도 내게는 의미 없었다. 나의 붕괴에 대해 나는 단 한 조각의 연민도 느끼지 않았다. 나 자신을 연민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테이블 위, 차가운 유칼립투스 줄기가 놓여 있다. 그 푸른 잎사귀는 희미하게 정화의 향을 냈다. 나는 이파리 몇 개를 꺾어 조용히 씹었다. 그리고 선언하리. 이 향을 맡으며 심장을 꽃병으로 바치리라. 나의 심장 안에는 오직 너의 기억만이 만개하리.

남들의 눈에는 병적인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소를 에너지로 삼는다. 고통, 상실, 너의 부재가 주는 독만이 나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카타르시스의 이명은 끊이질 않았다. 온통 네 말소리뿐인 나의 내면. 나는 이 고통의 메아리 속에서 나를 소모하며, 재회를 위한 기력을 보존하리.

길고 잔인한 천고마비의 계절이 지나고, 공기는 다시 차가워졌다. 드디어 다시 돌아오는 만추. 내가 너를 영원히 기억하기로 맹세했던 바로 그 계절이다. 내가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한 이유, 나의 몽상각에서 스스로를 뭉개뜨리며 연명해온 이유, 나의 심장을 꽃병 삼아 너의 자취만을 피워낸 이유.

훗날 네가 날 기억한다면.

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그때는 부디 우리의 사랑이, 나의 이 병적인 집착과 너의 현실적 존재 사이에 공존하길 바라며, 나는 차가운 창가에서 만추의 바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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