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끈한 교실로 들어가니 이미 도착한 부원들의 땀으로 가득했다. 다들 냉수를 마신다고 물이 줄줄 흐르고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털어 사방에 물이 튀었다. 물로 가득해진 교실이 질퍽하다. 익사할 것 같아.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동아리 부원들을 존중하겠다 선언한 담당 선생님은 에어컨을 18도로 맞추고 선풍기까지 4개를 틀어 교실을 남극북극 파괴의 원인으로 만드려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씨발 감사합니다 하고 절까지 했겠거니 지금은 사방에서 나를 강타하는 바람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패션으로 치던 집업까지 바람이 뚫고 들어왔다.
심지어 아아와 아이스티를 두 손 가득 사오셨다. 아니 뭐 오늘 남편이 루이비통에서 가방이라도 사줬나? 아니면 셀린느에서 옷이라도 쟁이셨나? 지나치게 행복해 하시는 선생님은 나에게 아이스티를 들고 돌진하셨다. 미쳤나 봐. 개새끼는 또 좋다고 아이스티를 받아 들고 헤헤 웃었다.
- 오늘 샘 완전 짱이당.
개새끼가 좋다니까 나는 아픈 와중에 또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그걸 본 선생님은 나에게 커피를 쥐어주며 덕담을 하셨다. -평소에 내가 동아리 참여가 존나 저조한 날 혐오하시는데 오늘은 집업이 예쁘다고 삑사리까지 내시며 말씀하셨다.- 어떻게 정상이 하나도 없지.
'지역 행사 참여 교내 예체능 동아리 필요 예산 확인 및 보조' 이번에 우리 동아리가 맡은 일이었다. 그니까 무대 뛰시는 분들 짐이나 들어 드리라는 말. 심지어 동아리별 계획표, 의상 및 소품 예산 결정도 우리가 해야 했다. 댄스부와 의견을 조율하고 밴드부와 장비 세팅을 조율하고···· 어떻게 이렇게 거지같은 동아리가 있지.
반쯤 공부를 때려친 학교답게 예체능 동아리는 어찌나 많은지, 댄스 동아리와 밴드 동아리를 제외하고도 오케스트라, 연극 동아리, 현대무용 동아리, 힙합 동아리··· 그냥 쇼미더머니나 고등래퍼나 나가주면 좋겠다. 우리는 힙합 동아리의 영상을 돌려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밤이 오고 이 밤이 가도 암 어웨이스어웨이크·····.
질퍽질퍽열병
열이 확 올라 대가리가 빙빙 도는 게 느껴졌다. 이번 공연 예정 무대들 연습 영상을 보는 와중에도 소리가 울려서 듣기를 포기했다. 다른 새끼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날 바라보는 개새끼의 시선이 느껴졌다. 선생님이 출석부로 내 머리를 빡 소리 나게 쳤다. 아 알겠어요····.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밴드 동아리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유얼마이에브리띵 마이 에브리띵. 노래 좋네.
댄스 동아리 의상 조율이 존나 어려웠다. 아니 시발 다같이 통일해서 입을 것이지, 다 다르게 어떻게 입냐고. 얼굴이랑 인맥만 보고 뽑아서 실력도 바닥에 처박은 주제에. 지들이 프로미스나인인가. 송하영백지헌처럼 생기지도 않은 것들이. 우리는 친절하게 예산이 부족하다고 보냈지만 쌩까고 에이블리 링크만 돌아온다. 이대로만 사면 된다고? 지랄.
자칭청유여자1짱 | 다른 동아리 예산을 줄여;
자칭청유여자1짱 | 싸가지 존나 없네 씨발
개새끼 | 산리오 잠옷으로 통일해서 산다
자칭청유여자1짱 | 씨발아 니 몇반이냐?
단체 카톡방은 벌써 지랄났다. 여기에 우리 담당 선생님 있는 거 모르나? 자칭청유여자1짱은 댄스 동아리 회장이다. 열여덟이나 처먹고 양아치 놀이 하는 걸 보니 벌써 앞날이 존나 창창하다. 너무 눈부셔서 안 보여 시발. 물론 얘네보단 개새끼가 친구가 많다. 저런 새끼를 좋아하는 미친놈은 전교에 드물거든. -카리나나 개새끼만큼 예쁘지도 않다.- 자퇴하고 평생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개새끼와 부원들이 열심히 병신 먹금을 시전해서 크롭티와 치마로 극적인 합의를 했다. 체력 끌어 모아서 개싸움을 구경하며 낄낄거리다 끝나고 바로 책상에 엎드렸다. 개피곤해. 대가리가 딩딩 울린다. 열이 몰아친다. 내가 아니라 세상이 녹아 내리는 기분. 교실에 난무하는 말들이 울린다. 어지러워.
교살이 물에 질퍽해지다 못해 푹 잠겼다. 출렁출렁. 사이사이 끼어드는 단어들은 물결처럼 번지고 에어컨이 돌라가는 소리가 파도처럼 번졌다. 철썩. 눈 앞에 개새끼가 두고 간 아이스티가 놓여 있다. 얼음이 서서히 녹는다. 책상으로 떨어지는 물. 뜨거운 숨을 내쉬면 기포가 되어 수면 위로 올라간다.
수면이 어디지?
바닥을 기던 모든 상념이, 너를 향하던 나의 사랑이 붕 떠서 날린다. 이대로 증발할 것 같아. 나는 그 사랑을 잡으려 가슴을 꼭 쥔다. 하지만 그 상념과 사랑을 잡은 건 내가 아니었으니. 그 무의식에서 느껴지는 내 머리를 쓸어 넘기는 네 손길이 느껴진다. 따뜻해. 따뜻해. 아, 잡혔다.
철썩철썩철썩철썩웅웅웅웅웅질퍽·····.
이대로 부유하고 싶어. 모든 움직임이 느릿하게 느껴진다. 주고 받는 말들이 물살을 가르다 결국 흩어진다. 무엇 하나도 똑바로 전해지지 않는 이 교실에서, 먹먹하게 파도 소리만 물 소리만 들리던 이 교실에서. 청아한 네 목소리만 나에게 정확히 닿았다.
- 괜찮아?
괜찮냐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까. 아 머리가 뜨겁다. 지금 네가 날 괜찮지 않게 하고 있잖아. 개새끼야. 너를 사랑하다 생긴 이 여름의 열병은 식지 못하고 깊어만 가. 나에게 얼음이라도 좀 줄래. 식을 수 있게. 더는 불타지 못하게. 이러다 타 죽지 않게 도와줘.
이 다정을 제가 어찌 할까요?
절대 넘실넘실 밀려오는 다정을 밀어낼 수 없는
저를 탓해야 할까요?
파도처럼.
물이 하수구에 빠지는 것처럼 후르륵 사라지고 시야가 돌아왔다. 파도 소리도 물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 정적과 정상적인 에어컨 소리만 들렸다. 다들 어디 간 것인지 교실에는 멍청한 자세로 앉은 나만 남아 있었다. 머리기 아파. 그리고 네 손길이 사라진 내 곁에는,
얼음이 녹아 사라진 아이스티 컵이 남아 있어.
https://curious.quizby.me/ugun…^ 퇴고 없어요 열병비례순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