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결말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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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0 06:26조회 35댓글 1소야
https://curious.quizby.me/Soyy…







우리의 죽음이 세상의 멸망이었으면 해

그렇게 빌었고

깨어났을 땐 모든 이야기가

그저 활자가 된 채





[그러니까 담아]






한요를 위해서라면 결말 개척을 포기할 것이다. 한요를 위해서라면 그게 한요가 원하는 바라면 배드 엔딩도······. 난 한요의 고해를 차마 다 읽지도 못하고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가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온 몸이 습하고 자꾸 물방울 같은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요. 한요야. 속으로 한요를 몇백 번쯤 외쳤다. 걷지도 못하는 한요가 날 따라잡았을 리도 없는데 내 눈 앞엔 계속 한요 얼굴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다 포기하고 한요를 보러가게 될 것 같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배경이 스치듯 지나간다. 한요. 한요. 한요야. 속으로 한요를 몇천 번쯤 부르니 세상이 맑아졌다.



더는 뛸 수 없을 것 같아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위가 온통 글자들로 가득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난독증에 시달렸다.





[한요는 ‘데미안’을 집었다. 그건 아직까지 찢어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낡은 고전 소설이었다.]
[한요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요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어쩌면 내가 마지막 인류는 아닐까?]
[한요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늘따라 심장 박동이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요는 게으름이 많은 편이었다. 얼마나 심하냐면, 귀찮아서 밥을 삼 일 내내 먹지 않았더니 몇 시간 동안 기절한 적도 있었다.]
[한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새 같은 것이 보였다.]




[한요는 자기보다 오 센치는 큰 것 같은 사람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이름이 뭐야?” 라 물었고, 그 애는]
[“이담.” 하고 대답했다.]



한요야.



[담은 높은 서랍장 정리를 잘 도와주곤 했다. 의자 위에 올라가기 귀찮아서 미뤄뒀던 일이 며칠 사이에 끝나버리는 것이 이상했다.]
[담에게도 좋아하는 것이 있을까? 한요는 뚫어져라 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담이 컵에 물을 담아 마셨다. 목울대가 울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요는 담을 따라 목을 더듬거렸다.]
[담이 처음으로 웃었다.]
[담은 꽤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담이. 담은. 담이가. 그러니까······]
[담은, 이상했다. 그게 한요가 담을 관찰하며 얻은 유일한 결과였다.]
[담은 그리고······ 한요를 움직이게 한다.]
[한요는 담을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해. 그 이질적인 한 단어를 몇 번이고 읊조렸다. 처음 말문을 튼 아이처럼 나는. 사랑해 한요야. 사랑해. 한요. 그러고만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거구나. 그게 사랑인 거구나. 나 지금 한요를 그대로 보내면 평생 후회하겠구나.




왠지 한요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글자들이 가득했다. 한요야, 나는 우리의 죽음이 세상의 멸망이었으면 좋겠어. 너의 죽음이 나의 멸망이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빌었고.



글자들이 마구 움직인다. 나는 글자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한요가 보고 싶었다. 한요를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평생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문장을 써 보려고 한다.







한요와 이담의 끝은 없다.


이 이야기는 결말이 없게 될 것이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한요를 지구처럼 얼게 만들 수도 없겠지만. 어떻게든.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우주와 행성만큼 많은 이야기 중 하나를. 세상을 꽉 채워도 사라지지 않을 많큼 방대한 글자들을. 순리를.








거스르게 할 것이다.









- 담아.







한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뺨을 쓰다듬는 손목이 가늘었다. 겨우 남은 체온을 나누려고 야윈 팔을 뺨에 묻었다.





한요의 작은 몸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 사랑해!


난 그동안 잊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되뇐 말을 뱉었다.


- 나도.


한요가 대답하자 무너졌던 세상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 앞으로 네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되지?

- 날 보면 되지.



꼬이고 꼬인 글자가 한요의 얼굴을 덮었다. 난독증이 아직 낫지 않았나. 알아볼 수 없었다.





- 그치만 넌.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요가 이야기가 되고 있어서.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 넌 책으로 볼 수 있겠지.




그래서 싫다.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가 싫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순간 한요의 머리에 씌인 글들이 읽히기 시작했다. ‘글자’란 ‘이야기’고 ‘전개’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끝을 방해할 수 있는 힌트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눈에 보인 건 한요의 독백뿐이었다.




- 차라리 다행이야.


[죽기 싫어]


- 추하게 늙는 건 싫어.


[이제 겨우 사는 게 재밌어졌는데]


- 내가 마지막 남은 인류라면서? 호강했지 그럼.


[사람들이 보고 싶어]


- 그래도, 담아


[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 지구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여겨줘.





한요에 머리 위에 씌인 말풍선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 ㅅ ㅏ ㄹ ㅏ ㅇ ㅎ ㅐ







한요야.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한요의 몸통까지 이젠 완전히 글자로 뒤덮여 버렸다. 한요는 없다. 한요를 의미하는 글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게으름쟁이. 장난꾸러기. 뜨개질. 지구. 인류. 마지막 인류.









아주 많은 글자들을 담은 종이가 책 하나로 덮여나갔다.

이내 출판사 [우주 연방]이 적혔고.

저자 칸에는 [한요 등 인류]가.

초판은 [2XXX년 X월 XX일]이.








그럼에도 여전히 한요는 살아있다.

······한요야, 이 모든 게 그저 이야기일 뿐일까?










[사랑해]


한요는 독백으로 답한다.










한요는 한 숨 한 숨을 힘겹게 내뱉고 있었다. 그 숨들이 활자들에 막혀 다시 되돌아오는 건 내 눈에만 보였으리라. 한요는 마지막까지 그저 웃고만 있었고 그래서 나도 마저 웃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 한요야.

한요는 이제 대답할 수 없다.

- 결말이 없는 이야기는 아무도 읽지 않을까?

한요는 역시나 대답하지 않는다.








한요라면 해피엔딩을 바랐을까?

이야기를 멈출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까?








나는

우리의 죽음이 세상의 멸망이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빌었고.











하늘이 답하길.







아니, 하늘에서는 답 없이 그저 글자들만 내려올 뿐이었고.










한요는.


마지막 숨을 내ㅂ





























- 연재중단된 행성입니다





























W. 소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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