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질퍽열병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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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5 22:32조회 150댓글 12유건
병실에 놓인 디퓨저기 실수로 툭 친 손길에 찰랑거린다. 옅은 우디향. 새삼스럽지만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 너는, 그러니까, 푸른 바다향? 날리는 모래향? 바다의 비린내가 아니라 시원한 여름의 향이 날 것 같은데. 내 기억 속에 너는 온통 다 탄 재향인데. 재에 물이 가득 묻어 질퍽인다. 검은 게 질퍽인다.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개새끼는 아이패드에 펜으로 여러 색조를 그리며 절망하고 있었다. 이제야 내신을 포기하고 자격증을 따려고 이것저것 하는 -사실 뭘 하는지 잘 모르겠다.- 모습이 안쓰러웠다. 공부 좀 하라니깐. 귀찮다며 자기 얼굴에도 화장은 커녕 선크림조차 안 바르는 개새끼가 자격증을 딸 수 있을지 존나게 의문이다.

모델을 구하는 건 돈이 든다며 나에게 저런 화장을 올리다 열이 오른 내 얼굴에는 화장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 아이패드 속 가상의 모델에게 저 지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맞나?

짐승 새끼들은 베라나 마라탕같은 식량을 항상 사와 자기들끼리 먹으며 가짜 눈물을 훔쳤다. 여기가 내 병실이 아니라 쟤네 아지트가 되고 있는 건 기분탓일까. 나는 먹지도 못하는 짠 감자칩을 짐승들에게 먹이고 개새끼가 자는 꼴을 구경했다. 잘 때는 진짜 얌전하다. 저렇게 앉아서 자면 허리 나가는데. 푹신해서 괜찮으려나.

입원하는 동안 누나와 개새끼가 번갈아 간호를 하니 화장실 한번도 편하게 갈 수가 없었다.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니 소화기관도 다 병신이 된건지 죽 하나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다 개워냈다. 여러모로 불편한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링거만 다섯개를 꼽고 의욕없이 개새끼를 구경하는 것밖에 할 짓이 없었다.

아버지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신겁니까. 제가 그렇게 아니꼬운가요. 제가 죄송합니다. 정말로요. 그런 호소를 입 밖으로 하면 개새끼는 내 이마를 짚는다. 씁 이상하다. 맛이 갔나?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난 꺼지라며 손을 뿌리친다. 개새끼는 내 이마를 꾹 누르며 웃는다.

저런 일이 있고는 가끔 개새끼가 내 지루함을 없애주려 TV로 네플릭스를 틀긴 했지만 결국 본인 집중이 안된다고 꺼버린다. 미친 새낀가? 나는 개새끼 취향의 플레이리스트만 주구장창 듣고 종종 개새끼가 해주는 메이크업 강의를 들었다. 들어서 어디 써먹을까 싶어도 나름 흥미로운 구석도 있었다. 나도 드디어 미친건가.

- 아니 나는 공부를 하잖아.

- 병 주고 약 주고 지랄을 한다.

가끔 개새끼가 오늘처럼 소파에서 쪽잠을 자거나 밥이나 약같은 걸 사러 나가면 이대로 영원히 병실에서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우울했다. 5년 내내 여름을 다 날렸으니 당연하겠지만. 개새끼가 흰머리 난 할머니가 되고도 내 옆에 있어줄 순 없을테니.

사실 지루하다 어쩐다 하지만 개새끼와 함께하는 입원 생활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단 둘이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나는 분명 전생에 전쟁같은 곳에서 큰 활약을 한 게 틀림없다. 단 둘이 있어도 그 어떤 사랑조차 할 수 없다는 건 불행일까. 전생에 누구 하나 지키지 못했던 것으로 정정하겠다.

그정도 죄를 지었으니 이딴 사랑이나 하겠지.

하지만 조울증 환자 수준의 감정 변화를 가진 나는 -아니다. 그냥 단순한 것.- 이런 땅굴 파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가도 -전쟁은 무슨 전쟁. 지랄을 한다.- 병원 앞에 위치한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와 쿠키를 들고 들어오다 덜렁거리며 넘어지려는 개새끼의 꼴을 보고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귀여워.


질퍽질퍽열병


개새끼는 햄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입 안에 넣고 씹으며 아이패드로 올리브영 앱을 뒤적거렸다. 힌심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이 -속으로 존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느껴졌는지 웅얼거리며 미래 계획을 자발적으로 브리핑했다. 생전 처음 듣는 자격증들을 나열하고 여러 취업 희망 기획사들을 읊었다. 간간히 익숙한 이름이 나오긴 했다. 예를 들어 하이브?

- 하이브? 니가 거길 들어가겠다고?
- 진심이야 아니면 구라야?

- 불만이있으시다면무물로해주뎨영.

제 2의 이사배가 되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개새끼를 만류하며 이마를 짚었다. 개새끼는 이미 유튜브로 창을 넘겨 이용복이 메이크업을 받는 영상을 보며 사심을 채우고 있었다. 미친 새끼. 자기도 나름 분석을 하겠다며 사용하는 화장품을 유추하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그냥 웃었다.

개새끼는 필기 시험도 중요하다며 챗지피티의 힘을 빌려 만든 자료에 줄을 좍 좍 그었다. 다른 손으로는 TV로 플레이리스트를 넘기는 중이었다. 멀티 진짜 잘하네. 마음에 드는 제목이 없는지 쩝 하고 입맛을 다지며 줄을 또 그었다. 그걸 다 외우냐는 내 질문에 이해만 하면 백쩜을 시전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 오 이거 맛있겠다.

이 멘트는 릴스에서 @@키작은친구가쏘기 이런 맛집 영상을 본 게 아니라 개새끼 취향을 저격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았을 때 하는 소리다. 개새끼는 배경 음악을 밥 다음으로 중요시했다. 돼지. 플레이리스트 제목은 얼추 널 사랑하기에 어쩌구. 노래 제목만 사진 아래에 띡 나오는 플레이리스트였다. #느좋 #사랑 이런 해시태그도 설명창에 여러개 깔려 있었다. 취향 진짜 여전하다.

플리에서 처음으로 나온 노래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노래였다. 이상원인가? 그 사람이 추는 영상을 개새끼가 보낸 적 있었던가. -그 체인 묶는 노래를 춘 사람이다. 최근에 금발을 했다고 개새끼가 좋아했던.- 열이 여전히 높아서 정신이 몽롱했다. 몇 마디의 가사만 귀에 들어왔다.

지옥 같은 시간에 난 깨달아. 낮이 됐건 밤이 됐건 의심없이 아이러브유. 넌 나의 답. 난 괜찮아. 널 원해, 괴롭지만. 올나잇 나를 태워····? 베이비 No doubt······ 씨발. 개새끼 선곡 나 저격하나.


지옥 같은 열기 속에 난 깨달아.
나는 너를
화르륵화르륵화르륵화르륵화르륵······.

- 사랑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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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고 없어요 잔향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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