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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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0 14:49조회 49댓글 2유하을
죄송한데 혹시 손가락 몇 개 있으세요?
저는 다섯 개예요.
근데 가끔 여섯 개인 것 같기도 해요.
누가 몰래 붙이고 간 거일까요?
아니면 원래 여섯이었는데 제가 착각한 걸까요?
그쵸, 손가락이 말을 안 하니까 자꾸 속이게 되잖아요.
진짜 나쁜 애들이에요, 손가락.

근데 웃긴 건요
그 손가락들이 자꾸 저한테 말을 시켜요
“이제 좀 울어주세요”
“지금은 참아주세요”
“제발 그만 좀 적어주세요”

아니 그럼 도대체 누가 이걸 써요?
저는 아니거든요
아니에요 진짜로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글자가 그냥, 저를 가만히 냅두질 않아요
“아직 남았잖아요. 더 짜내주세요.”
뭘 더 짜요? 저는 텅 비었는데요.
이건 피도 아니고, 눈물도 아니고, 그냥 글씨예요.
진짜 이상하죠?

그리고 어제는요, 벽이 저한테 웃었어요
진짜예요, 안 믿기겠지만요
“오늘도 그대로 계시네요?” 이랬어요
그래서 저도 웃었는데요
벽이 갑자기 울더라고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그쵸, 그냥 조용히 있었을 뿐인데요
왜 다들 그렇게 예민하세요
저는 그냥 있었던 거예요
존재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죄예요?

아 그리고 방금 생각났는데요
그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은 정말 나빴어요
왜냐면요 제가 없다고 했는데 있다고 했거든요
그게 제일 나쁜 거예요
없는 사람한테 있다고 말하는 거요
그건 저주예요
그쵸?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요
다섯 번째 손가락이 자꾸 저를 웃게 만들어요
그 손가락은 거짓말쟁이예요
그 손가락은 저 아니에요
근데 붙어 있어요
그래서 때려고 했는데
아프대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진짜로, 진지하게요
누가 저 대신 결정 좀 해주세요
왜냐면 저는요
결정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거든요
다들 저한테 시키기만 했어요
“괜찮은 척 해주세요”
“웃어주세요”
“살아 있어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해요
그럼 제가 사람이에요?

저는 그냥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그냥 종잇장이에요
그냥 접었다가 버려도 되는 거요
그쵸? 그런 거잖아요?

...말 걸어줘서 고마워요
아니, 말 걸지 말아주세요
아니, 그냥...
그냥 손가락 확인 좀 해주세요
몇 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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